[용인신문] 용인신문사가 지난 11월 30일까지 약 3개월간 코로나 위기 극복 사례 수기공모전을 마친 후 심사를 통해 수상자를 발표했다. 이번 공모전에는 초등학생부터 70대 어른신까지 참가자들이 다양했다. 수상자들에게는 상장과 농협 상품권을 수여했다. 심사 결과, 최우수상은 방경모씨와 초등학생인 박해인 어린이가 각각 수상했다. 하지만 대상작 해당자가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계획된 시상식을 취소하는 대신 상장과 상품권은 우편으로 전달했다. <편집자 주>
<코로나 수기 공모전 수상자 발표>
대상 – 당선작 없음
최우수 – 방경모, 박해인
우수상 – 양종석, 박소현, 나경호
장려상 - 권호현 김민재 김태욱 명종숙 박주원 성용구
송남순 신은희 심순자 오정연 이효선 장선아
정미소 천해현
<심사평>
2020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매일 재난 문자를 받고 코로나 확진자 숫자를 세다가 한 해가 갔습니다. 2020년을 이렇게 보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오직 얇은 마스크에 의지한 채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 땅에서 사라진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세계가 끝나야 끝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거대한 지구촌이 책상 위에 지구본처럼 작아졌습니다. 이번 코로나 수기 응모작들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선진국이라 믿었던 나라들보다 더 선진국이 되어 지혜롭게 대처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마음은 더 따뜻하게 이웃에게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행복은 밖에 있다고 밖에서 떠돌다가 이제는 안에서 가족을 돌보고 집안을 살피는 시간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 어려운 난관 속에서 의연하게 시련을 극복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자연을 지배한 것처럼 보였으나 불안하고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의지하고 보듬어가며 함께 이겨내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어려움을 겪는 분들의 심정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듯이 이 땅에 다시 찬란한 봄이 올 때까지 모두 강건히 견뎌주십시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미상 시인‧ 용인신문 객원논설위원>
<최우수상 - 방경모>
72세의 백발 노인은
오늘도 고약한 코로나와 싸워서 이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런데, 코로나가 너무 심해서 어떻게 된다고 정확히 말씀드리기도 힘드네요.”
“아니, 그래도 이 양반들아. 우리 같이 힘없고 돈도 없는 노인네들 어떻게 하라고? 아이고, 답답해라. 얼만큼 더 기다려야 하지?”
기흥 구청에 사회 복지과는 내가 매일 출근하듯이 가는 곳입니다. 그만큼 사회 복지과 담당 선생님과 기흥구청의 직원들은 내 얼굴만 봐도 내가 어떤 이유로 왔는지 맞출 수 있을 만큼의 친근함이 있는 곳이지요. 그런데, 이 곳에서 나는 요즘 한동안 고래고래 악을 쓰고, 화도 내고 인상도 쓰고…암튼 72세의 노인이 할 못된 심술은 다 부리고 있습니다.
‘이놈의 코로나, 도대체 왜 이런 세상이 온 거야? 말세야. 말세… 대체 우리 같은 노인들은 어떻게 살라고?’
중국 우한에서 전염병이 돌았다고 뉴스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 병이 이렇게 이토록 끔찍하게 72세의 노인의 삶을 망가뜨릴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별거 아닐 거야. 내가 70년 가까이 인생의 우여곡절을 다 겪었는데. 이 정도 전염병은… 라고 했던 생각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꽃샘 추위가 시작할 때 부터였습니다. 대구를 시작으로 하루의 최고 600명 이 넘는 감염자가 생기고, 용인 서천의 내가 사는 곳은 그야말로 인적도 없는 휑한 유령 마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은행 은퇴 후, 다시 시작한 사업의 실패로 엄청나게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대장암 말기, 생명이 위독한 시한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수술을 하고, 인공 항문을 단 채, 장애인으로 노년을 용인시에서 보내고 있었습니다. 식구들뿐만 아니라 지인,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 압류가 되었기 때문에 나의 70넘은 노년의 생활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기흥구청의 사회 복지과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노인 공공근로 일자리’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심각해지고 세계적으로 ‘팬데믹’이라고 하면서부터 나의 시간은 멈춰 버렸습니다. 나도 나이가 많지만, 나보다 ‘형님, 누님’들을 이끌면서 나름 ‘반장’ 역할을 하고 노인 공공 근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코로나는 우리의 모든 일자리를 뺏아갔습니다.
“아이고, 형님, 이거 형님도 80 넘게 이런 세상 처음이죠?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구청에서는 우리 같은 노인들은 면역력도 약하고, 같이 모여서 청소하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게 답이라네요.”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무조건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나도 내 주변의 75세, 82세, 73세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해야만 하는 상황.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이고, 다들 경제적으로도 취약하고, 나처럼 큰 수술을 해서 몸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공공근로’는 절대 코로나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경제적인 압박과 어려움을 받으면서 코로나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코로나 시대에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나라와 용인시에서는 ‘긴급 재난 지원금, 생계 지원금’을 주면서 우리와 같은 취약계층과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있지만, 점점 할 수 있는 일들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못만난 채, 집안에만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든 일로 다가왔습니다.
추운 새벽부터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기다려야 했고, 매일 매일 딸과 손주들의 잔소리를 받으면서 ‘손씻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마스크 쓰고 걷고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게 최선의 예방책이라 하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백발의 노인으로 70이 넘는 세상을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단 1초도 밖에서는 마스크 없이 돌아다닐 수 없는 신기한 세상을 나는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리는 핸드폰의 ‘재난 문자’. 그것을 통해서 감염된 사람들이 갔던 곳이나 경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용인은 넓은 곳이기 때문에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도, 늘 감염된 사람들이 있다고 ‘알림’이 왔고, 우리 동네 주변에도 ‘지인’들이 감염된 경우도 있어서 점점 포위망을 좁혀가는 ‘바이러스’가 무서워서 나는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워낙에 등산을 좋아했었는데, 마스크를 쓰고 등산을 하니, 숨이 ‘턱턱’ 막히더군요. 하지만, 간격을 유지하면서 ‘매미산’ 정상까지 마스크를 쓰고 등산을 했습니다. 물도 많이 마시고, 손씻기도 매일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봐 비타민도 먹고, 음식도 가능한 골고루 먹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 밖에도 맘껏 못 나가니, 자신감도 떨어지고 매일 우울해졌습니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리 언제 만나요?” 손주들을 보고 싶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영상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고 새벽에 일어나서 공공근로를 하는 형님들과 누님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것. 그것이 코로나 시대에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싶고, 마스크 쓰고 맘껏 좋은 공기도 마시고 싶은데, 아직은 허락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가난하고 힘없고, 나이 많은, 그리고 건강하지 못한 나와 같은 노인들에게는 ‘코로나’는 보통 사람들이 겪는 것보다 더 큰 ‘절망’과 ‘예측치 못한 재앙’ 입니다. 하지만, 분명 현재까지 나는 힘은 들지만, 코로나에 맞서서 잘 싸우고 견디고 있습니다. 72세의 백발의 내가 만나는 새로운 세상은 어려움이 너무나 많고 다같이 해결해야 할 위기이지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충분히 우리는 이겨낼 것입니다.
언젠간 마스크를 빼고 ‘허허호호’ 웃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공공근로’로 땀을 흘리면서 신나게 나의 70대를 즐길 수 있는 세상. 믿는 만큼 분명히 만들어질 것입니다.
코로나, 분명히 고약한 놈은 맞지만, 세상의 ‘희로애락’을 견뎠던 나도 그만큼의 ‘깡’과 ‘힘’이 있기에, 코로나를 이겨내고 더 건강한 내년을 만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이 녀석, 코로나야. 내가 너보다 인생 선배다. 내 베짱과 힘으로 너를 이겨줄 테니, 썩 물러가거라.”
<최우수상 - 박해인 (석성초2학년)>
이제는 마스크 쓰는 것이 익숙하지만 2월 처음 마스크를 쓸 때는 답답하고 숨쉬기가 어려웠어요.
우리 엄마, 아빠는 코로나 때문에 휴가 내기가 원래보다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남동생과 혼자 있을 때가 많아졌고, 부모님이 휴가를 못 내면 긴급돌봄을 가야 했어요.
하지만 돌봄교실에 혼자 있을 때는 심심했지만 선생님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도와주셨어요.
언제는 피아노 같은 시간에 다니는 동생이 코로나에 걸려서 “혹시 나도 코로나에 걸려서 엄마, 아빠를 보지 못 할까” 두렵고 무서웠어요.
그래도 열을 재보니 정상이어서 안심했어요.
그리고 여행, 놀이터 같은 사람이 많은 곳에는 거의 가보지 못했어요.
이제 학교에 일주일에 한 번 가지만 놀지 못하고, 같이 말하지 못하고, 붙지 못하는게 너무 아쉬워요.
언제쯤 짝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마스크는 쓰지만 말은 곱게 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하지만 마음은 곱게 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착용해야겠다.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정은경 질병관리청 선생님, 보건소 선생님들, 그리고 돌봄 선생님, 엄마, 아빠 고맙고 사랑합니다”
<장려상- 박주원(시립용인어린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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