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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벌거벗은 임금님’

오룡(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용인신문]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시인 이성복이 말한 ‘그날’이 2023년 대한민국의 ‘오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중략)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1926년 발행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누구인가. 고교 시절 국어 점수를 위해 ‘조국’이라고 적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필자의 수업을 듣는 MZ세대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애인’이라고 답한다.

 

만해 한용운은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여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님의 침묵’은 출옥 후 민족 계몽의식 고취기에 쓴 시다. 식민지 조국을 위해 신음 정도는 기본이고, 저항을 당연하게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침묵 상태로 있는 자들은 타협주의자이거나 민족 반역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시험 출제용으로 ‘님의 침묵’에서의 ‘님’을 조국과 민족이라고 단정하는 것. 이제는 틀렸다고 하자.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경문왕은 조금 특이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웬만한 동화책에는 다 실려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乃登位 王耳忽長如驢耳). 왕후나 궁궐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 만이 알아보았지만, 왕의 비밀을 말할 수 없었다. 왕의 협박이 있었을 것이다.

 

복두장은 비밀을 혼자서 간직하느라 병이 날 지경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 그는 대나무 숲으로 갔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나무 숲에서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 소리가 들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사실을 알게 된 왕은 대나무 숲을 모두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12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시일이 걸려도 언젠가는 다 밝혀진다. 숨기려 했던 것은 더 오래도록 기억된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세상 물정을 몰랐다. 그는 새 옷을 너무 좋아했다. 새 옷으로 몸치장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나랏일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백성을 돌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기꾼 재단사들에게 속아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을 입었다. 신하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리석음이 탄로 날까 두려웠기에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궁궐의 모든 신하들이 아름다운 옷이라고 극찬했다. 임금도 자신만 안 보인다고 하면 바보가 될까봐 더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때 한 어린아이가 외쳤다. “어! 임금님이 아무것도 안 입었어!” 임금은 당황했지만, 몸을 더 꼿꼿이 곧추세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행진을 계속했다. 시종들은 있지도 않은 망토 자락을 더 치켜들고 걸었다.

 

거리를 벌거벗고 다니는 놀라운 용기를 보인 임금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건 ‘나는 천상의 옷을 입고 있다’라는 믿음이었다. 바로 ‘더 닝 크루거 효과’인 무식한 사람이 잘못된 신념을 가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에 비해 경문왕은 자신의 당나귀 귀는 흠(欠)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숨기고 감추려 한 이유이기도 하다. 비밀을 알 만한 사람들을 협박하거나 매수했다. 영원히 입을 다물게 했다. 집요한 감시와 수사로 정상적인 생활을 어렵게 한 것이다.

 

먼 훗날, 우리 역사에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벌거벗은 임금님’의 주인공이 동시에 탄생할지도 모른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듣기평가 내용들이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특정 대나무 숲(언론)과 특정 인물을 찍어낸다고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궁궐의 모든 신하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위해 망토를 들고 날뛰어도 부끄러움과 치욕을 당하는 자는 벌거벗은 당사자이다. 아직 모르고 있는 건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