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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순수예술이 대중속에 뿌리 내려야”

박숙현의 더굿피플| 한국문화예술위원장 오광수예술의 생활화 위한 인프라 구축 강조

   
 

사진설명:오광수 위원장은 환기미술관장, 베니스 비엔날레 커미셔너, 광주비엔날레 전시 총감독,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지냈다.(부인 차우희씨는 1985년 독일 정부 장학금을 받아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는 화가이다.)

지난 1988년 마북동에 작업실을 만들고 수시로 용인을 드나들고 있는 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장(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인터뷰 약속을 한지 며칠 후인 2월 12일 문화예술위원장에 임명됐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지난해 832억원, 올해 760억원의 막대한 예산을 쓰는 조직의 위원장이 된 소감을 물으니 새삼스레 무슨 소감이냐며 “순수 창작 지원 목적의 출발 정신으로 되돌아가 방만한 운영을 간추리고 장르 이기주의에서 벗어난 균형감 있는 지원이 급선무”라는 진단부터 내놨다. 성과물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선택과 집중적인 지원의 필요성도 피력했다.
그는 현재 순수창작보다 대중문화가 우세한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문화가 진정 가야할 길에 대한 장애요인을 정비할 필요성도 강조했다.
덧붙여 예술의 생활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면서 예술가를 현장에 파견해서 교육하는 방식 등으로 순수 예술이 대중속으로 파고 들어 전반적인 대중문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한다는 방안도 들려줬다.

■ 용인과의 인연
오 위원장이 처음 용인에 내려왔을 때 고 장욱진 선생이 생존해 있었다. 생전 살던 집(현재의 마북동 고택이 아님)과 그의 작업장이 가까웠다.
특별한 에피소드를 물으니 “술 마시는 것은 없으니까”라며 다만 60~70년대 오 위원장이 공간 편집장 시절, 작가 화실탐방을 위해 덕소 아뜰리에로 처음 취재 갔을 때 장욱진 선생이 참 좋아했었다는 오래전 기억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오 위원장은 마북동 자신의 작업실 정자에서 지인들을 불러 조촐한 파티도 자주 열었다고 했다.

■ 용인의 문화예술 발전 방향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사업을 펼치는데 용인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이 모여 있으니 미술관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행사가 바람직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경기문화재단이 총괄 네트워크를 만들어 한국민속촌만이 아니라 이런 곳들을 두루 투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나오시마는 크지 않은 보잘것 없던 섬이었지만 동네 촌장과 베네세 출판 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사장이 의기 투합해 예술촌을 만들어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안도 다다오가 지중 미술관을 만들었듯 용인도 미술관을 기점으로 문화 사업을 하면 나오시마 같은 마을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백남준 미망인 구보다 시케코에 대한 생각
미망인인 구보다 시케코는 남편의 고국인 한국을 자신의 고국처럼 여기고 있으며, 특히 명예 용인시민증을 서정석 시장으로부터 받았고, 사후에는 백남준과 함께 하고자 한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백남준 아트센터 개관식 등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한국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독일이나 일본 등은 구보다 시케코를 통한 백남준 사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는 반면, 백남준 아트센터가 소재한 한국에서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같은 사실에 대해 오 위원장은 미망인을 소외시켜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장조카와의 관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부인 자신도 비디오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미술을 직접 그리지 않는 이유
홍대 미대를 나온 오 위원장은 6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된 후 갈등을 겪었다. 창작을 버리기 아쉬웠지만 자기 모순이 생길 수 있어서 미술은 취미로 하기로 했다. “내가 운이 좋았죠. 동아일보에 계속 글이 올라가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요.”
오 위원장은 현대미술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보람이지만 자신이 창작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라고 말했다. 한편 1968년 공간에 있을 때 백남준 선생을 우리나라에 제일 처음으로 소개했다. 백 선생의 뉴욕 주소를 알아내서 글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는데 백선생이 유치원 시절의 이경희라는 여성을 대상으로 쓴 연애시를 사진 몇장과 함께 보내왔다.

■ 잊지 못할 분
그는 스승인 김환기 선생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예술가 기질이라 할 뚝심이 있으신 분이셨죠. 불구의 몸인데도 게의치 않고 자기를 밀고 나갔다는 것에 배울 점이 있어요. 김환기 선생은 동양화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동양화는 과거 전통적 인식이 강하지만 그는 대담히 동양화와 전통적인 민화에서 오는 조형성을 나름대로 해석해 바보 산수를 완성했죠. 그는 전통을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굉장히 풍부하게 만든 분이에요.”

■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부인에 대해
“아내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차우희(서양화가)라고….”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4년 있을 때 1년에 한권씩 미술사를 정리했는데 지속적으로 해야겠어요.” 그는 예술은 특정 1인의 힘으로 되는게 아니라며 현대 예술이 정통의 방향으로 가게끔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고, 제대로 방향이 잡혔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며 짧은 만남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