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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두들겨 만든 방짜 유기…진품, 여기있네!

2005년 ‘경기으뜸이’…무형문화재가 꿈50여 년 방짜유기 수저…맥 끊일까 걱정박숙현의더굿피플/| 쌍둥이 방짜 유기장 김상구·김상국옹

   
 
한국민속촌 장터 공방에서 방짜유기 수저(놋숟가락, 젓가락)를 11년째 만들고 있는 김상구 김상국 쌍둥이 형제(75).
민속촌 유기는 혼수용품으로도 잘 나가는데, 더욱이 이들 수저세트는 튼튼하고 가벼운 방짜 수공예품인데다 다른 곳 주물 제품 보다도 저렴해서 더욱 인기가 높다.
이들 형제는 유기 수저 만들기를 19세부터 했으니 잠시 동안의 외도를 빼고도 50여이라는 긴 세월동안 수저만 만들었다. 당연히 방짜 놋수저 만드는 일은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한다.
먹고 살기 위해 배운 일. 당시는 누구나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인데다 더욱이 유기 만드는 직업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유기장이었던 부친은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 먹지 못해 돌아가셨을 정도였다. 쌍둥이 형제는 당시의 징그럽던 가난을 안타까이 회상한다.
“생각도 없었어. 밥만 있으면 돼. 눈에 밥이 선했어. 쌀밥 한 그릇 먹으면 죽어도 원이 없을 정도였지. 그래서 밥밖에 몰랐어. 그런데 시방은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지. 허연 쌀밥도 싫으니.”
유기장이란 직업이 예전보다야 나졌지만 여전히 힘든 직업임에 틀림없다. 이들 형제의 소원을 잘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이들 형제의 소원은 무형문화재. 왜냐면 전국에서 두들겨 만드는 방짜 유기 수저를 제작하는 이들은 이들 형제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데, 힘도 들고 맥도 끊일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한몫 거드는 거에요. 무형문화재가 안 되면 도대체 팔리지 않아요. 이름이 나야 이게 많이 나가요. 또 문화재가 아니면 배우러 오는 제자도 없어요. 괜히 배웠다가 밥 굶으니 젊은이들이 우리 같은 사람 밑에서는 배우질 않아요. 아들도 회사 다녀요. 문화재가 돼야 자식이라도 대를 이을 텐데. 그리고 무형문화재가 만든 것들만을 찾으니 제품 값이 비싼 거에요.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어요.”
고생담부터 제작 과정까지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는 쌍둥이 형제. 평일임에도 인터뷰 도중에 참으로 많은 초등학생들이 이곳 공방을 방문해 제작과정을 묻는다. 일본인들도 와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수저를 만져보기도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우리나라 성인들도 물론이다. 궁금한 것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개중에는 옛일을 떠올리며 추억담을 늘어놓는 손님들도 있었다.

#19세 때 먹고 살기 위해 시작
유기가 유명한 고장 안성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 쌍둥이 형제. 당연히 아버지 형제 모두 유기 일을 했다.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유기 공방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작고한 후 먹고 살 일이 막막했던 이들은 작은 아버지의 권유로 유기 일을 배웠다. “우리 형제가 일곱이었는데 형이 밥 굶는 일이라며 유기일은 배우지 말라고 했어요. 얼마나 열악했으면 그랬겠어요. 당시 유기일을 하던 형님은 6.25때 제2 국민병으로 나간 후 연락이 끊겼고, 아버지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시게 되자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 우리는 삼촌이 닷새 장마다 쌀 한말씩 주겠다고 하여 유기 일을 배우게 됐어요.”

#새벽 3시에 공방 나가
“새벽 3시면 공방에 나갔어요. 겨울에는 어찌나 추웠는지 몰라요. 그때 먹기를 제대로 먹어, 입기를 제대로 입어요. 새벽에 공방에 가다보면 늑대도 있었어요. 한창 젊은 때라 잠이 달았거든요. 꿀 같은 잠을 깨가지고 하는 거여요.” “그때 전기가 어디 있어요. 광솔이나 들기름 놓고 하루 종일 깎았지요. 저녁 대여섯시까지 50개 깎았어요. 큰아버지는 만들어 놓은 것을 팔으셨지요. 당시 시세는 숟가락 1단이 숟가락 열개를 말했는데, 쌀 두말이었어요. 쌀값이 비쌌었죠.”

#19세 때 독립
삼촌 집에서 일을 익힌 두 형제는 일 배우던 해에 독립했다. 형 김상구 옹은 수원으로, 동생 상국 옹은 충주로 각기 공방을 찾아 나섰다. 형은 무질을 하고, 동생은 가질을 했는데 각기 자신들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갔다. 편지는 매일 했다고 한다. “쌍둥이는 떨어지면 못 있는거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유기 공방이 당시에는 많았다. “일 좀 하니 여기저기서 환영받았죠. 그런데 일 잘하면 생전 머슴꾼 하는 거야. 이리 저리 사람들이 끌어가. 이곳 저곳 많이 옮겼지. 서울 아현동에서도 일했어. 그런데 도회지에 살아야겠더군. 시골서는 생전 쳐다보지도 않는데, 서울에 가니 사람들이 나를 떠받들고 일 가르쳐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여태껏 이 고생하고 있지 뭐.” 형 상구 옹은 옛일을 즐거이 회상한다.

#스테인레스 나오면서 미장일 시작
스테인레스가 나오면서 유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 미장일을 했다. 형은 벽돌을 쌓고 동생은 시멘트를 발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형과 동생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88올림픽이 시작될 때 유기가 다시 살아났어. 지금은 작고한 안성의 김근수가 무형문화재가 되면서부터였지. 김근수 공방에서도 우리 형제가 일한 적이 있지. 그때 유기가 인체에 좋다는 방송이 나갔어. 어항에 유기를 넣으니 물고기가 더 잘 돌아다니고, 스텐레스를 넣으니 물고기가 죽는다는 실험이었어.”

#2005년 경기 으뜸이 선정
“2005년에 경기 으뜸이에 선정됐지만 별다른 혜택은 없어. 그냥 상패 하나준 것 뿐이야.” 그래도 쌍둥이 형제는 으뜸이 선정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공방 앞에 걸린 빛 바랜 수상 사진 속 쌍둥이 형제가 함빡 웃는다. 가질 하는 동생은 보호 안경도, 마스크도 없이 놋 수저를 전기로 곱게 갈고 있다. 먼지 먹고, 쇳가루는 눈으로 귀로 튀어 들어간다. 안경이나 마스크는 답답해서 못쓴단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꼽이 전부 쇳가루란다. 그래도 아픈 적은 없다. “타고났어. 우리나이 돼서는 행복해. 젊어서도 좋으니까 했지.” “내가 만들 때 이쁘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잘 나오면 기분 좋지. 또 사람들이 많이 찾고 사가니 기분이 더 좋지.” 아침 5시 30분이면 안성 집에서 나온다. 7시 정도면 민속촌에 도착해 불피고 단도리하고 일을 시작한다. 12시 정도되면 집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한잔 들이킨다. 점심은 민속촌 관광객들 때문에 일찍 먹게 돼 12시 정도면 출출해질 때다. 순동 1근에 주석 4냥 5푼 비율로 용해하는 합금은 섭씨 3300도에서 한다. 무질가락 만들 때 용해된 뜨거운 쇳물이 튀면 결단이 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 종일 공방에서 숯 가마의 고열과 씨름하고, 망치로 두드리고, 펴고, 깎고, 다듬는 일을 반복하기를 50여년. “무형문화재를 해주면 후계자가 있고, 그게 안 되면 종말이야. 후계자 양성 시킬려면 우리를 무형문화재를 만들어 줘야해.” 쌍둥이 형제는 아이들처럼 순수하게 무형문화재 하게 해달라고 자꾸만 주문한다. 그런데 두 형제의 말이 옳다. 방짜 유기의 맥을 잇고, 인체에도 좋은 유기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김상구, 김상국 형제의 말을 고집 내지는 투정 정도로 여겨서는 켤코 안된다. 전주에 들렀을 때 먹은 전주 비빔밥은 유기그릇에 먹어서 제맛이 났던 것같다. 안동에서 먹었던 헛제삿밥도 유기 반상기에 먹어서 제 맛이었던 것 같다. 음식문화와 어우러진 관광자원으로도 훌륭한 유기를 지키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