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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 살면서 느끼는 보람

 

   
김중위(金重緯)

 

초대 환경부장관
제12. 13. 14. 15대 국회의원
고려대학교 초빙교수(현)

 

유서 깊은 용인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6~7년이 되었다. 가끔 용인이 고향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때마다 필자는 <어사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어비리>는 있어도 어사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1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어사리라는 주막집 이름을 지금의 용인사람들이 어찌 알 것인가? 일부러 얘기를 해 보자는 수작으로 한 말이다. 필자 역시 어사리에 있는 주막집 옥호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은 한말(韓末)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자 글배운 사람으로 이 지경을 당하고도 죽을 수 있는 선비 하나 없다면 말이나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유명한 절명시를 쓰고 자결한 순국열사다. “미치광이만 들끓는 도깨비 나라”에서 무슨 벼슬이냐고 하면서 장원급제도 팽개치고 고향에 돌아와 47년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본대로 썼다. 그것이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그 매천야록에 나오는 얘기 중에 어윤중(魚允中)이가 도망가다가 맞아죽는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하필이면 용인으로 도망가다가 어사리라는 주막집에서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어윤중이가 어씨(魚氏)이니 죽을 곳을 찾아가 죽은 것임에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수근 댔다는 얘기다. 어사리를 어사리(魚死里)로 해석한 것이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불량배로 위장한 일본군에 의해 시해(弑害) 당하자 고종은 그 이듬해 2월에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俄館播遷))하면서 친일관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 여러 차례에 걸쳐 총리직에 있었던 김홍집이 성난 군중들에 의해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개화파의 탁지부대신으로 활약했던 어윤중도 용인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평소 점괘를 잘 보는 그가 동쪽으로 가면 길하다는 점괘를 믿고 동대문을 거쳐 용인 쪽으로 갔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용인과 얽힌 유서(由緖)다.(어떤 자료에 보면 그가 죽은 마을의 이름은 장서리라고도 한다).
대대로 처인구에 살았다는 꽤나 유명한 한분을 우연히 만나 필자는 오랜만에 유명한 분을 유명한 처인성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를 한 후 처인성에 대한 얘기를 좀 자세히 알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의외로 필자보다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오히려 설명을 해 주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황제께 바칠 물건 중에 수달피 1,000장을 바치라 하셨는데~~사방에 널리 구하여 다달이 모으고 나날이 저축하여 ~온갖 힘을 다해 977장을 바칩니다. ~~또 국왕의 공주와 대관의 총각 처녀 500명과 여러 분야의 공인(工人)을 보내라는 일에 대해서는~ 나라가 협소한 까닭으로 신하의 반열에 있는 자도 2500명에 불과 하고 소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데~~이들이 모두 상국(上國)으로 뽑혀 가 버리면 그 누가 있어 ~대국을 받들어 섬기겠습니까?”(김경수 역)
고려 말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가 몽골의 장군 살리타(撒禮塔)에게 보낸 편지다. 살리타가 누구인가? 그가 바로 몽골이 고려를 침공할 때에 앞장섰던 몽골군사의 선봉장으로 처인성에서 승려출신 장군 김윤후에 의해 사살된 장본인이다.
익히 아는바 처럼 몽골은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이 세운 제국이다. 고려가 좀처럼 우호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자 이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후 30여년간에 걸쳐 7차례에 걸친 침공을 감행하였다. 그 침공의 첫번째 선봉장이었던 자가 바로 살리타였다. 그는 1231년 대륙초원을 누비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급기야는 개경을 포위 압박하였다. 고려는 힘에 밀려 할 수없이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살리타는 일부군대를 주둔키고 자신은 철수 하였다. 고려는 몽골군이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 몽골과의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몽골은 이 천도(遷都)가 자신들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보고 철수 7개월 만에 2차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때도 그 선봉장은 살리타였다. 그는 강화도성을 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였으나 강화해협의 물살을 바라만 보았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살리타는 군사를 이끌고 내륙을 침공하면서 노략질과 살인과 방화로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짓이겨 나가다가 드디어 용인의 처인성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처인성은 그래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용인의 유서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를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그날 그날 적은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과 필자 미상의 <임진록>을 보면 광교산에 얽힌 얘기가 나온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의식을 다 치르고 난 얼마 후 나만갑은 오랑캐의 통역으로 온 한 사람을 만나 묻는다. “이번에 온 군사가 얼마냐?” “20만이라고 하지만 14만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죽은 적병은 얼마나 되나?” “불과 몇 만밖에 안 됩니다”“한(汗)의 매부가 광교산(光交山)싸움에서 죽었습니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군사가 청군을 이긴 유일한 전투현장이 광교산전투라는 얘기다.
광교산 전투는 청군과의 싸움으로만 유명한 곳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도 광교산은 처절한 전투현장이었다. 매복해 있는 왜구를 쳐부순 한양의 방호벽이었다. 광교산 자락의 한 끝에 있는 조정암(趙靜庵)의 묘소를 남모르게 참배 할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능원리에 있는 정포은(鄭圃隱)의 단심가(丹心歌)가 새겨져 있는 시비(詩碑)를 오가며 볼 수 있는 즐거움은 용인에 살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보람이다.
강화만이 아니라 용인도 가히 살아 있는 역사 박물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