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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40여년을 한결같이 지켜온 뒷골목 쉼터”

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 ‘신풍슈퍼’ 주인 윤선엽(72)

전국적으로 골목상권이 죽어가고 있다. 외부의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대형 유통점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유통시장을 무차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새 주위의 구멍가게나 소형매장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유다. 안타깝지만 뒷골목 생활경제의 중심축은 점점 무너져 그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됐다. 그래서인지 이젠 뒷골목에 남아있는 구멍가게(소규모 슈퍼마켓)를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연기념물처럼 살아남아 40여년을 꾸준히 서민경제의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한 곳이 있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명소로 탈바꿈한 ‘신풍슈퍼’. 단골손님들에겐 동네사랑방이나 다름없다. 허름한 그곳을 사람들은 ‘신풍카페’ 또는 ‘서룡카페’라고도 말한다.

 


누구든지 한번 만이라도 이곳을 와봤다면 분위기에 먼저 취할 것이다. 현대식 마트와는 거리가 먼 ‘신풍슈퍼’. 세월이 흘러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꿋꿋하게 생활경제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담배 소매를 겸한 만물 잡화점이지만, 무엇보다 대폿집으로도 유명하다.


나이든 어르신들은 이곳을 수용소 자리로 기억한다. 지금이야 흔적도 없지만, 역사와 추억이 있는 터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의 뒷골목. 서룡초등학교가 인근에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아 웬만한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래도 세대를 바꿔가며 단골손님들이 찾아온다. 한자리에서 변함없이 40여년을 지켰으니 그럴 법도 하다. 바로 이곳을 지켜온 주인은 윤선엽(72세) 할머니다. 특유의 수더분함과 순수함 때문이리라.

 

맛있고 값싼 옛날 대폿집의 추억 살아있는 곳
뒷골목 서민들의 안식처이자 명소로 자리매김

 


   
윤 할머니는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속하는 보길도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결혼 후 서울 답십리에 살다가 용인까지 왔다. 용인 와서 큰돈은 못 벌었지만, 이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6남매를 공부시켜 모두 출가 시켰다. 손주 녀석들만 열둘이니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이젠 칠십이 넘어 일을 한다는 것이 힘겹지만 자식들한테 부담주기 싫어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손을 놓지 못한다. 돈을 벌기보다는 혼자 움직이며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하다. 오래 전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왔고, 각종 소형마트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타격이 크다. 다행히 월세를 내지 않는 집이라 버틸 수 있다고.

 

“대형마트 때문에 타격 커…자식들한테 부담주기 싫어”

신풍슈퍼는 365일 문을 연다. 이른 아침에도 담배 손님과 건축 일용직 노동자들이 장갑을 사러온다. 또 참으로 먹을 우유와 빵을 사러오기 때문에 일찍 문을 열 수밖에 없다. 슈퍼는 그렇다 치고 막걸리를 팔아 조금 남는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최상의 양념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에 맛도 좋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기자 역시 이곳을 드나든 지 1년이 다되어 간다. 이젠 새내기 단골손님 축에 속한다. 이곳엔 동네 어르신들은 물론 건축노동자부터 조기축구회나 산악회 동호인 등 직업도 연령층도 다양하게 찾는다.

   
신풍슈퍼의 특징은 메뉴판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되는대로 시켜 먹는다. 그래도 배고픔과 추억을 떠올릴수 있는 메뉴 한가지. 바로 삶은 계란이다. 한 개에 300원. 굳이 메뉴를 소개하자면 즉석에서 끓여주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한 냄비 5000원, 막걸리 한 되가 3000원이다. 두세 명이 돈 만원이면 배가 부르다. 찌개 종류도 꽁치나 참치 등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윤 할머니의 왕대폿집 인기비결은 또 있다. 막걸리는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 ‘용인막걸리’를 쓴다. 맛도 좋고 뒤 끝이 깨끗해 막걸리 마니아들이 선호한다. 왕대포 한 대접에 1000원을 받는다. 기자도 학창시절부터 용인막걸리를 마셔왔기 때문에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너무 인심이 좋아 얼마나 남느냐고 묻자 윤 할머니는 “그래도 막걸리 한말 팔면 만원은 남잖아요”하신다.

 

손맛과 값싼 음식, 그리고 용인막걸리 인기

 

   
점심시간이후 어렵게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손님들이 끊이지 않아 수차례 중단됐다.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한쪽에는 건축분야 노동자들, 그리고 한쪽엔 휴일을 맞은 택시운전사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들에게 왜 이곳을 찾느냐고 묻자 옛날 왕대포의 추억 때문이란다.
윤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음식을 만들고, 슈퍼 손님들까지 받는 등 1인 2역 이상의 일을 하신다. 느린 것 같지만, 척척 해내신다.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는 손님들이 알아서 계산한다. 이곳엔 빌지도 없고, 외상장부도 없다. 다만 3년 동안의 색 바랜 달력이 겹겹이 걸려있다. 달력엔 이따금 외상술을 먹는 사람들이 적어놓고 간다.
혹시 외상값을 떼어먹히지는 않느냐고 하자 “우리집엔 그런 사람은 별로 없어요”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신뢰와 정이 쌓여있는 곳임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물론 가끔은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윤 할머니의 부드러운 한마디에 화해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인터뷰 내내 가만히 들어보니 어느 손님도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안 보인다. 보통 40대 중반 이상의 손님들이 많다보니 어머니나 아주머니, 혹은 누님이란 말을 더 자주 쓴다. 그게 더 잘 어울린다. 얼마 전 까지 만해도 생머리에 쪽을 지셨으나 이젠 귀찮아 잘랐다고 말씀하신다.
많은 손님들이 서민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은 신풍슈퍼가 오랫동안 남아있길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 할머니, 아니 우리들의 영원한 젊은 누님, 어머니로 건강하게 사셔야 한다. 골목상권이 붕괴되는 이 시간에도 특유의 순수함과 부지런함으로 서민들의 삶을 따듯하게 지켜주는 마지막 파수꾼. 그녀의 삶이 아름답다.
<글 / 본지 발행인 김종경 iyongin@nate.com>
<사진/ 김영옥 시민기자 kyo9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