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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창간 기념 특집 - 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유민영 (연극 평론가, 현 서울예술대 석좌 교수)

창간 기념 특집/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유민영 (연극 평론가, 현 서울예술대학교 석좌 교수)

한국의 연극사를 개척한 대표 학자  ‘유민영’


고향 용인으로 돌아와 연극사 집필 작업에 일로매진

 

 

   
▲ 한국의 연극사를 개척한 대표학자 '유민영'
현존하는 용인 출생 인물 중에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와 학계를 통틀어 자랑스러운 한명을 꼽는다면 과연 누가 있을까.

 

기자가 20여 년간 지역신문에 몸담아 오면서 파악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연극평론가이자 학자로 평생을 몸바쳐온 유민영 교수다.

용인의 아들 유민영! 그는 고향 용인이 너무 변해서 실망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용인은 용인이야. 난 풍광 좋은 용인이 너무 좋아” 라고 말한다. 인생 말년을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와 살고 있는 노학자 유민영 교수.
지난 10월 『용인문학』인터뷰를 겸해 수지구 신봉동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연극평론가 유민영(74· 서울예대 석좌교수). 그는 한국의 연극사와 희곡사를 학문으로 정립시킨 선구자 겸 종결자로 불릴 만큼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정년퇴임 후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며, 집필에 골몰하고 있는 70대의 현역인 노교수를 만났다.

먼저 우리나라 연극평론계의 석학으로 불리우는 그의 출생 이력을 간단하게 알아봤다. 1937년 출생. 고향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진목리. 자타가 인정하는 용인의 아들. 1954년,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갔다가 2002년 대학에서 정년퇴임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옴. 무려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관통하며 오롯이 연극과 희곡이란 학문을 정립시켜온 외길 인생. 그 사이 이 분야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고, 그 업적의 방대함은 아직까지도 비교 대상이 없다.

# 연극학의 선구자 겸 종결자로 우뚝

50년 만의 귀향. 강산이 변했어도 다섯 번 이상 변했다. 먼저 그에게 고향 용인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남사면 진목리야. 아직도 거기 옛날 집이 있어. 이젠 나이 때문에 시골집은 불편해서 못살아. 여기(수지구 신봉동)가 좋아.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광교산으로 산책도 가고, 명상도 하고…. 아무리 변했어도 용인은 용인이야. 일단 풍광이 좋잖아.”

 

   
그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오직 후학들을 위한 마지막 연구가 욕심이라면 욕심이랄까.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도 고향에서 집필 작업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단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오라는 곳이 많아. 하지만 이젠 학자로써 깨끗이 마무리하고 싶어. 물론 몸이 옛날 같지는 않아. 노화 때문인지 자잘한 병들이 생겨. 그래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큰 병은 없어.”


# “아무리 변했어도 용인은 용인이야”

꼿꼿한 노학자의 기품 그대로다. 1960대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독일 비엔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고, 한국에서는 국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이후엔 꾸준히 한국연극과 희곡문학을 연구했고, 김재철(金在喆) · 이두현(李杜鉉)을 이은 한국연극 · 희곡사 연구의 대표 학자로 불린다. 특히 국문학적인 시각에서 연극비평의 방법을 정립시킨 인물로는 단연 선구자다. 그만큼 한국 현대 연극의 역사적 위상과 문맥 파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결과, 한국 최초의 희곡사인 『한국현대희곡사』(1982)와 연극사를 연극운동의 관점에서 서술한 『우리시대 연극운동사』(1989)를 저술했다. 또 실증적인 작업의 결실로 『개화기 연극사회사』(1987)와 『한국극장사』(1982)까지 저술했다.

한국연극사와 공연 현장에 대한 관심을 체계화한 연극평론집으로는 『한국연극의 미학』(1982), 『전통극과 현대극』(1984) 『한국연극의 위상』(1991) 등이 있다. 지난 5월에는 『한국근대연극사』(단국대학교출판부, 1996년)를 새롭게 증보한 『한국근대연극사 신론』(상·하)을 펴냈다. 해방 이후 좌우 이데올로기 연극의 대립과 이념적 갈등으로 갈라선 남북한 연극의 변화까지 추적하고 있어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수상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 연극계에서는 제1세대나 다름없다. △제1회 일석 학술상 △제3회 서울문화예술평론상 △제51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홍조근정훈장 △제1회 노정 김재철 학술상 △보관문화훈장 △제14회 동랑연극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방대한 저술과 수상경력이 제1세대 반증

 

   
인생의 기로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 유민영 교수 역시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할까, 평론을 할까 고민했다. 결국 60년대 초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학문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대 2년 선배였던 김윤식(전 서울대 국문과 교수)은 비평사를, 그는 연극 관련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국 평단의 역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엔 복사기도 희곡집도 없었어. 희곡집이래야 고작 유치진과 윤백남 꺼 4~5권 정도였지. 국립도서관에도 자료가 없었고, 그나마 자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 그래서 10년 이상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어. (지금 생각하면) 난 고속도로를 뚫는 사람이었지. 일단 뚫어놓는 작업만 한 거야.”

그는 그렇게 1960~1970년대까지 황무지였던 연극 · 희곡분야를 학문의 반열위에 올려놓았다. 첫 결실이 바로 『한국현대희곡사』(1982)였다. 한국의 극장사도 그의 몫이 됐다. 또 장르별로 희곡, 극장, 인물 등을 합쳐 연극사까지 썼다. 과연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연극사와 희곡사가 있었을까. 또한 현재와 같은 연극계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연극은 현장만이 아니라 이론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분야만큼은 내가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있었지.”

그는 학문과 현장 평론작업을 겸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비평(평론)과 학문의 두 칼을 들었던 것이다. “학문은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우리 연극이 번창해서 세계 연극과 같이 할 수 있도록 <연극학>을 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여전히 꿈 많은 젊은 학자다. 연극학에 반세기를 몸 바친 그가 지금도 하고 있는 일과 꿈이 있다면 무엇일까.

“지금 작업 중인 것이 두개가 있어. 하나는 우리나라 연극의 기초를 닦은 『유치진 평전』을 쓰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현대통일연극사 후편을 폭넓게 쓰는 거지. 북한을 비롯한 연변, 카자하스탄까지 포괄한 통일연극사야. …그 다음엔 오태석과 이윤택까지 들어가는 인물연극사 3권을 쓰고 싶어.”

# 비평과 학문의 두 칼을 들고…

1960년대 초 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하던 곳은 명동에 있던 국립극장 뿐이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유치진 선생을 만났고, 그때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평생을 한국 연극사와 연극 이론을 정립하는 것을 역사적 소명감으로 알고 살아왔던 것이다. 당시에도 평론을 했던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평론집 몇권 정도 내고는 사라졌다. 집요하게 외길인생을 걸어온 사람은 오직 유민영 교수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취미와 잡기가 없어. 골프 · 바둑· 마작 같은 것도 할 줄 몰라”

젊은 시절에도 술자리가 많았던 연극판에서 밤 10시만 되면 일어났단다. 처음엔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학문을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기에 어쩔수 없었다는 것. 지금까지 그 원칙을 지키며 살고 있다는 그가 우리나라 연극계의 대표 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노학자라고 하기엔 아직도 학문의 열정이 철철 넘치고 있는 그만의 학문세계와 철학의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연극학을 인문학으로 봤고, 인문학자로서 연극을 접근했어. 난 배우보다는 희곡을 중심으로 연구했거든. 희곡은 문학의 한 장르잖아. 희곡사를 정리하다보니 극장으로, 인물로 방향이 바뀌면서 시야가 확대되더라구. 그렇게 연극을 50년 동안 총체적으로 학문화한 것 같아.”

 

연극이 무엇이기에 그의 인생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하고 시원하게 정의한다. “연극이란 사람들을 위한 위안물로서의 예술이자 일종의 고급스런 오락물”이라고.

“인간에게는 오락과 위안물이 필요하잖아. 난 인간에게 개미와 베짱이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해. 세상사가 조화를 이뤄야지. 요즘은 연속드라마가 위안물이야.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TV드라마로 위안을 삼고 있지. 옛날엔 극장가서 연극이나 서커스 밖에 볼게 없었거든.”

그는 평론 역시 늘 비판적으로 썼다. 동경 유학생들이 쓴 진지한 연극보다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악극이나 신파극 등에 더 주목했다. “보는 사람이 많아야 연극”이라는 평상시 지론도 한몫을 했다.

“전쟁 중에는 대구에서 연극을 많이 했어. 햄릿도 했지만, 여성 국극(國劇)이 인기가 많았지.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을 정도였거든.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이 연극으로 위안을 받기위한 거였지. 1990년대 들어 고르바초프 시절에 소련을 갔을 때도 저녁한 끼 제대로 못 먹는 사람들이 볼쇼이 발레를 보고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을 봤어. 우리도 마찬가지야. 전쟁 중에 더 극장에 사람들이 몰렸지. 그러니까 잘살고 여유가 있어서 극장에 가는 게 아니야. 전쟁이나 혼란기, 즉 불안한 시대에 대중문화가 더 발전하는 법이지.”


# “불안한 시대에 대중문화 발전하는 법”

노학자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연극계는 어떤 모습일까.

“과거에는 무대와 관객이 분리됐지만, 이젠 경계가 허물어져 객석과 하나가 되고 있지. 연극의 글로벌화라고 할까. 뮤지컬 시장만도 2000억 원대 시장이야. 하지만 대부분 수입품이지. 맘마미아나 렌트 등…… 연극시장도 개방되어 세계화되는 추세야.”

그는 20세기 말까지의 연극사를 쓰겠다고 말한다. 변화된 연극판과 후학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이젠 학교 보다는 집에서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저술 작업을 한다는 유민영 교수.

유민영 교수는 20여 년 전, 용인문화원에서 특강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고 박용익 용인문화원장 시절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지방문화발전을 위해서는 미친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용인의 연극발전을 위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용인시장을 비롯한 영향력있는 지도자들의 의식이 깨어야 한다고. 그는 한때 예술의 전당과 정동극장 이사장 등 외부 기관에도 몸담았던 문화전문가다. 용인문화발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문해 줄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용인에 이사 온 명망있는 문화예술인들을 지역으로 끌어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아울러 “인구 100만을 육박한 용인지역의 연극 발전을 위해서는 300석 규모의 잘 만들어진 소극장이 필요하다”고 부언했다. 단,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라 시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 문화전문인력 지역으로 끌어내야

“역사는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또 연극이란 예술은 무엇인가를 늘 질문하면서 글을 쓰고 있지. 인문학적인 의문을 끝없이 하면서 말이야.”

아직도 연극책 보다는 철학 · 역사 · 문학 · 주변예술 관련 책을 더 많이 읽고 있다는 유민영 교수. 그의 방대한 저술에 뜨겁게 배어있는 역사관과 인문학적 사고의 배경이다.

현재 계획하고 있는 몇 권의 집필이 끝나면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도 내고 싶다는 유민영 교수.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역시 건강이다. 자잘한 병들이 과로 때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모습에서는 노교수나 노학자의 모습이 아닌 젊은 학자의 뜨거운 열정이 더욱 되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