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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구석구석 배인 문학의 향기를 따라가다…

|용인 문학순례길을 걷다|-4

|용인 문학순례길을 걷다|

넷, 금강의 원류인 물레방아를 찾아가다- 단국대 신동엽의 시비에서 민속촌 이하윤의 시비까지

용인 문학순례길의 4코스는 용인의 새로운 중심지인 수지구와 기흥구를 중심으로 발굴 조성하고자 한다. 단국대학교 교정에 있는 신동엽 시인과 김용호 시인의 시비를 시작으로 죽전동에 있는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문학비와 묘역, 지곡동에 있는 음애 이자 선생의 고택과 묘소를 거쳐 한국민속촌 안에 건립된 이하윤 시인의 시비까지를 연결하는 문학순례길이다.

   
▲ 단국대 상경관 앞의 신동엽 시비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의 신동엽을 만나다

신동엽의 시비를 용인에서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최근 문학적 고증 없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문학비를 볼 때마다 마음 아파하는 필자에게 단국대학교 상경관 앞에서 만나는 신동엽 시인의 시비는 묘한 긍지를 준다. 이 시비는 시인의 24번째 기일인 1993년 4월 7일 사학과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한남동 캠퍼스 퇴계중앙기념도서관 앞에 세운 것을 죽전 캠퍼스 이전과 함께 현재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시비의 앞면에는 ‘신동엽 시비’, 뒷면에는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를 새겼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94번지에서 태어나 부여보통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거쳐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역사를,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는 국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역사에 대한 냉철한 지성과 안목을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의식은 시인이 후에 민중의 진정한 대변자가 될 수 있는 견고한 초석이 되었다. 그는 1959년에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현실에 대한 인식과 동학사상에 대한 관심은 4․19 혁명을 거치면서 시인을 한 시대의 역사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의 정신은 1963년에 발표한 시집 『아사녀』와 1967년에 발표한 서사시 『금강』으로 진정성 있는 꽃을 활짝 피우게 된다.

시비에 새긴 신동엽 시인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를 감상하며 발길을 돌린다. 이 시는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할 민족 현실에서 순수한 민족적 삶이 보장되는 민주 사회의 열망을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 단국대 사범관 앞에 있는 김용호 시비 '나비'
학산 김용호 시인의 「날개」를 만나다
학산 김용호 시인의 시비 「날개」는 신동엽 시비에서 약 40m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1975년 단국대학교와 한국문인협회가 주최가 되어 한남동 캠퍼스 교정에 건립한 것이다. 문학비 옆에는 1998년 한국문인협회와 SBS가 공동으로 건립한 문학 표징비 ‘김용호 선생의 문학 산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 자리에서 문학적 경향이 다른 두 시인의 문학비를 만난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학산 김용호 시인의 시비 「날개」는 신동엽 시비에서 약 40m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시비는 1975년 단국대학교와 한국문인협회가 주최가 되어 한남동 캠퍼스 교정에 건립한 것이다. 문학비 옆에는 1998년 한국문인협회와 SBS가 공동으로 건립한 문학 표징비 ‘김용호 선생의 문학 산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 자리에서 문학적 경향이 다른 두 시인의 문학비를 만난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올해는 학산 김용호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5월 3일 한국작가회의와 대산문화재단은 ‘2012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개최했는데 그 행사에서 ‘향수의 미학과 서민의식의 추구-김용호의 시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김용호 시인은 1912년 5월 25일 경남 마산시에서 태어났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마산상업학교 졸업 후 잠시 사회생활을 하다 1935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신인문학》에 「내 사랑하는 여인아」와 「첫 여름밤에 귀 기울이다」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시비가 단국대학교에 세워진 것은 오랫동안 단국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대 강사 출강을 시작으로 부교수와 교수를 역임하며 1968년에는 문리대 학장에 취임하게 된다.

   
▲ 십청헌 김세필 선생의 문학비와 묘역 전경
십청헌 김세필을 만나다
단국대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죽전로를 따라 1.2km 정도를 가면 내대지마을이 나오는데 대청초등학교 바로 옆 야산에서 김세필의 문학비와 묘소를 만날 수 있다.

단국대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죽전로를 따라 1.2km 정도를 가면 내대지마을이 나오는데 대청초등학교 바로 옆 야산에서 김세필의 문학비와 묘소를 만날 수 있다.

김세필 선생의 묘소(죽전동 산 23번지)는 1999년 도지정문화재 제92호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인지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 묘역 앞에서 가장 먼저 답사객을 맞이하는 것은 재실인 와운정사이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 음식 장만, 음복,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재실을 나와 묘역을 바라보면 두 개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뒤로 팔작지붕 모양을 한 비각 안에는 1687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묘소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는 선생의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2002년에 세운 문학비 ‘십청헌 김세필선생 문학비’이다.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회장 이상보)와 경주 김씨 문간공 심청헌파 후손들이 공동으로 세운 문학비에는 한시 ‘應製咏落霞(응제영낙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는 김세필 선생이 1490년(성종 21)에 18세의 어린 나이로 임헌시에서 장원급제를 하자 성종이 그의 영특함을 시험하기 위해 ‘裙․君․分’의 세 운자를 주고 시를 짓게 했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 음애 이자 선생의 고택전경
지곡동에서 음애 이자 선생을 만나다
기흥구 지곡동에는 음애 이자 선생이 생활하던 고택(지곡동 297-2번지)과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역(지곡동 산 11-17번지)이 있다. 경기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 지역의 주택 모습이라고 한다. 이 고택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물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직도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집은 사람이 생활하면 그 수명도 더 연장되며 튼튼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기흥구 지곡동에는 음애 이자 선생이 생활하던 고택(지곡동 297-2번지)과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역(지곡동 산 11-17번지)이 있다. 경기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 지역의 주택 모습이라고 한다. 이 고택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건물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아직도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집은 사람이 생활하면 그 수명도 더 연장되며 튼튼하게 유지된다고 한다.

고택 앞에는 모두 세 개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좌측부터 두 개의 문학비는 이자 선생이 남긴 한시 「秋月」,「卽事」,「自歎」를 새긴 것이고, 우측에 있는 문학비는 ‘敬承 文懿公 陰崖 李先生(諱 籽) 학술연구회 慶頌詩’를 기록한 것이다.

이자 선생은 1480년 서울에서 대사간 이예견의 아들로 태어났다. 벼슬이 형조판서, 우참찬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사림파로 지목되어 파직 당한다. 그는 조광조 등 기호 사림의 급진적 정치 개혁을 따르지 않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중도적 정치 노선을 걸었다. 기묘사화 후 음성에 퇴거하여 스스로 ‘음애’라는 호를 짓고,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였던 김세필, 이연경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쳤는데, 저서로 『음애일기』,『음애집』등을 남겼다.

   
▲ 민속촌에 건립된 이하윤 시비

물레방아의 시인 이하윤을 만나다

4코스의 도착지는 한국민속촌 안에 있는 연포 이하윤 시인의 시비 「물레방아」이다. 이하윤의 시비를 찾아가려면 먼저 민속촌의 제일 안쪽인 시장터 옆에 있는 물레방앗간을 찾아야 한다. 사실 관심을 기우리지 않으면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 물레방앗간 옆에서 이하윤의 시비인 ‘연포시비’를 만날 수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물레방아」가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이하윤 시인의 10주기를 기념하며 1984년에 건립했는데 서예가 여초 김응현의 글씨를 음각한 것이다. 붉은 색의 글씨가 강렬한 인상을 주며 주변의 풍광과 잘 어울려 민속촌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시비의 뒷면에는 시인의 약력이 정갈하게 기록되어 있어 답사객들이 시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연포 이하윤 시인(1906-1974)은 1926년 《해외문학》동인 및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애조를 띤 민요조의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하윤은 영문학자로 더 유명하다. 해외문학파로 불리는 그는 주로 외국시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활동을 했다. 이러한 번역 활동은 외국의 다양한 문예사조를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구적 자유시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담담했다.

김용호 시인의 시에서 보이는 향수의 미학이나 신동엽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저항의 정신은 그 뿌리를 선각자 이하윤의 문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치 물레방아의 물줄기가 모여 금강을 이루듯이.
<용인문학 편집주간 안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