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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대조 작가

아이들의 눈망울 통해 ‘인간성 회복’ 투영

   
회화와 사진과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자유로운 형식의 화면. 그 속에 투영된 전쟁과 테러와 환경 파괴라는 세기말적인 현대인의 자화상. 우리는 박대조를 마주하는 순간 미래에 대해, 인간의 실존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박대조는 화면을 가득 채운 어린아이의 순수한 얼굴, 아이의 맑은 눈망울 속에 인간이 저지른 추악한 종말론적 상황을 극명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이미 때는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인간 스스로 치유의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있다. 그는 보여주기만 할 뿐 꾸짖거나 강요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박대조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절박함 속에서도 결코 인간을 포기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주는 인내를 발휘한다. 이제야 문득 되묻고 깨닫는 인간.

   
박대조는 최근 인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전시회를 마쳤다.
커다란 화면 뒤에 장착한 LED 조명의 색이 서서히 바뀔 때마다 아이의 얼굴이 주는 느낌이 변한다. 보는 이의 마음을 당겼다 밀쳤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게도 했다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슬프게도 만들면서 21세기가 빚어내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을 호소했다.
호소가 강렬할 수 있던 것은 그가 캔버스 삼아 메시지를 담아낸 아이의 눈망울 때문인지 모른다.

박대조가 포착한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는 어이없게도 핵폭탄의 먼지구름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 담겨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천진스럽게 웃는 아이 얼굴에서는 공포와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장면을 들여다보는 우리들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공포와 절망감에 떨게 된다.

화면속의 어떤 아이는 따져 묻는 것 같은 눈망울로 어른들을 쳐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소통의 단절, 일방적 횡포를 고발하는 듯도 보인다.

박대조에게 순수한 아이의 눈동자는 캔버스다. 어른들에게 더 이상의 파괴를 일삼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기에 가장 적절한 도구다.

   
마치 3, 4년 인생을 산 아이에게 30년도 더 산 엄마가 이것도 모르냐며 호되게 꾸짖을 때처럼,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동공은 어른들이 저지르고 있는 인류의 해악을 무방비상태로 맞닥뜨리고 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과 마음을 낮출 때 아이의 눈에는 구도자의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지게 된다. 박대조가 아이의 눈동자에 그려 넣은 예수의 상이나 두 손 모은 평화의 기도는 인간이 가야할 방향이다.

“왜 아이의 얼굴인가하면 저는 시험관 아기로 자식을 낳았습니다. 아이에 대해 간절했던 제 경험의 반영이죠.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 앞에서 미안하지 않는가 하는 자책. ‘장자 철학을 통한 망아 세계의 표현 연구’라는 석사 논문을 썼는데, 무위자연의 아이콘, 순수하고 욕심 없는 아이가 보는 어른들의 인위적이고 파괴적인 이항대립적인 간극을 통해 인간의 나갈 바, 가치관에 대해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동자 속에는 정신과 영혼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눈동자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는 아이콘입니다.”

   
그의 화면은 철학이다. 인간이 죄책감 없이 자행하는 수많은 파괴적 행위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처방일 수 있다. 아이의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강렬히 빛나는 순간, 마치 핵폭탄이 터지는 듯 인간의 파괴행위가 극대화 되면서 인류와 자연의 공멸을 향해 치닫는 몰인간성의 절정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충격을 통해 인간 스스로 치유의 힘을 얻어 건강성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는 박대조의 실존적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예술적’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내용, 즉 철학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는 내용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표현방식, 예술 행위 자체가 서사이고 철학이다.

그가 비단 바탕에 세필로 동양화식 표현을 하고, 거기에 서서히 색을 바꾸는 조명을 끌어들여 시간적 개념을 입히는 행위나, 대리석 바탕에 사진으로 찍어온 얼굴을 확대해 음각으로 새긴 후 묵과 아크릴로 채색하는 상감기법의 자유로운 탈 장르적이고 총체적인 행위는 같은 사물을 다원적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철학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의 서사시를 읽는 듯 박대조의 경험과 의도가 녹아 있는 작품을 통해 감상자들은 사색의 폭을 무한대로 넓혀나가게 된다.

전시회를 마친 그는 이제 몇 개월 동안 쉴 생각이다. 그는 보통 수개월 몰입과 쉬기를 반복하면서 작품을 내놓고 있다. 그에게 쉬는 시간은 작품 활동을 하는 시간일 뿐이다. 오지를 다니면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경험과 사유를 넓히는 작가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