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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사람

한국전쟁 남하…그리고 60여년 '능원리의 삶'

천주교 신앙 안에서 행복한 삶

“돌아보니 행복하게 잘 살았어. 4남매 모두 결혼 잘 하고…. 신앙생활의 힘이었어.”

   
▲ 이명숙 씨
시집온 후 1955년부터 지금까지 6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가계부를 써오고 있는 이명숙씨(82세).
소중히 보관해온 가계부와 틈틈이 써놨던 여행기, 수필 등을 토대로 82년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을 지난 1월부터 집필, 8월 중 출간을 앞두고 있어 잇따라 세상을 놀래키고 있다.

모현면 능원리 산중 아름다운 자택에서 만난 그녀. 여전히 수줍은 소녀의 미소 속에 깃든 빛나는 푸른 꿈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80세가 돼서야 30여년 간 해오던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고 이제는 그녀가 다니고 있는 능평 성당에서 성가 반주를 하고 있다고 첫 운을 뗐다.

가계부, 피아노, 자서전 등 80세가 넘는 세대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더군다나 모현면 능원리 산골마을 아낙으로 살던 여성의 삶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독특한 이력.

세상에!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삶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녀는 강원도 철원 실향민이다. 해방 후 국토가 분단 되면서 철원은 북한 땅이 됐다.

6. 25때 친할머니와 그녀만 남하했다. 당시 철원여고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결국 철원여고 마지막 졸업생이 됐다.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녀는 김일성 대학 진학을 앞둔 소녀였다.

그녀는 철원여고의 최고 우등생이었다. 수학 기하문제도 교내에서 혼자 풀 정도였고, 영어도 잘했다.

“최우등생이라 무시험으로 들어갈 건데…. 수물과를 꿈꿨지. 그때 읽었던 퀴리부인 전기의 영향도 있었어.”
실력이 출중했던 그녀는 김일성대학교 수학물리과 진학을 꿈꿨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원산교대에도 원서를 써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삶을 평탄히 놔두지 않았다. 아니,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6. 25가 터지고 전염병이 돌면서 우여곡절 끝에 집에 남아있던 그녀와 할머니 단 두 사람은 가족과 헤어져 국방군에 의해 군용 트럭에 실려 남쪽, 즉 용인 신갈 피난민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소녀의 꿈과 가족을 모두 북에 남겨놓은 채 피난민 생활이 시작됐다.

마침 할머니 친척이 용인에 살고 있었고, 당시 눈물로 지새는 그녀의 혼인을 걱정하던 할머니가 혼인을 서두르는 바람에 1953년 20세의 나이로 혼인식을 올렸다.

잘 나가던 인텔리 여학생의 별만큼이나 무수했을 푸른 꿈은 모두 능원리 그녀의 시집으로 옮겨져 그 후 60여년 인생의 참다운 희로애락을 이곳에서 꽃피웠다.

처음에는 도무지 자신에게 주워진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음악적 소질이 많던 그녀에게 음악선생님이 개인교습을 해주었고, 학교 반주를 도맡아 하면서 이미 평범하지 않은 남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던 비범한 그녀가 아니던가.

온갖 재능을 두루 갖춘 인텔리 소녀가 첩첩 산골,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농사짓는 집안으로 시집와 난생 처음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손이 얼어붙는 개울물에 빨래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당시 자신이 처했던 삶 속에서 순순히 혼인을 택했다. 선보러 가자면 따라나서지 않을 것을 안 그녀의 할머니는 그녀를 친척 만나러 가자고 속이고 대동했다. 그날 처음 스치다시피 보고는 얼굴이 빨개졌던 수줍음 많던 청년이 운명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시댁에 적응하면서 그녀의 삶을 가꿔나가기 시작했다. 가족과 헤어진 슬픔을 성당을 다니면서 달래기 시작했다. 당시 반주자가 없던 성당 피아노가 주인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62년에 세례를 받았고, 지금까지 온 가족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 1955년부터 60년 동안 써온 가계부
그녀는 첫 아들을 낳은 후 1955년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말은 가계부지만 초창기 것들은 농사일지였다. 부농이었던 그녀 집의 유일했던 소를 빌려주어 논밭을 갈게 해주면 소 빌린 값으로 그녀 집 품앗이를 해준 기록들이 눈에 띤다.

그런데, 대학노트에 펜으로 정갈하게 쓴 일지는 모든 기록이 한 줄짜리다.

“당시 종이가 귀했고 공책도 귀했지. 여러 줄 쓸 수 없었어. 수원에 소 팔러 갈 때 부탁해서 공책 하나 사오고 그랬어.”

두 살 아래의 조카딸이 자신의 일지를 훔쳐보는 것이 싫어서 소리 나는 대로 영어로 쓴 일지도 꽤 있다. 자잘하면서도 정갈한 글씨체에서 그녀의 뛰어난 실력을 읽을 수 있다.

그녀가 집을 비운 날에는 지금은 작고한 남편이 썼다.

음력, 양력날짜와 날씨, 온도까지도 기록한 일지는 비록 한줄 기록일지라도 귀한 사회상, 농촌생활, 기온변화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체 32권 가운데 두 권이 분실돼 아쉬움이 크다. 1권에 2년 치가 들어간다.

가뭄이 심해서 벼모종이 못자리에서 겨울을 난 적도 있었다. 부농이었던 그녀의 가족은 감자와 보리밥으로 연명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나물을 뜯어먹는 집도 있었다. 그렇지만 장리쌀이 있어서 굶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 집안에서는 각종 채소와 과일을 심었고, 특히 오이를 많이 심어 수원장에 팔러 다니기도 했다. 오이깎두기도 해서 먹었다.

1984년에 그녀는 자녀들을 다 키워놓고서 꿈에도 그리던 피아노 학원을 능원리에 차리고 레슨을 시작한 것이 2년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레슨비가 2만5000원으로 비싼 편이었는데, 깎아 주기도 하고, 돈 대신 곡물로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친할머니는 1980년에 그녀에게 영창 풍금을 선물해주셨다. 지금도 할머니를 떠올리며 풍금을 친다.

60여년 이산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견뎌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대학자가 돼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모현면 능원리에서의 삶만큼 행복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녀는 능원리에서 빛나는 가정을 꾸려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값진 인생을 살았다.

그녀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았다. 더없이 부드럽고 자상했던 남편 전영근씨와 함께 회갑 기념으로 다녀온 유럽 성지순례 여행을 비롯해 세상 구경도 많이 했고, 방송국에 부부가 출연하는 멋진 순간을 누리기도 했다. 2남 2녀의 아들 딸과 7명의 손주를 거느린 평범하면서도 신실한 신앙 속에서 반듯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일궈온 그녀의 삶은 그녀의 자서전 속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로 그녀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길잡이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