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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기행 1 상트페테르부르크

불면의 백야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 1 상트페테르부르크

 

불면의 백야

 

글 사진 이상엽/작가

 

올해는 러시아혁명이 일어 난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며 혁명은 잊혀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변화되는 러시아를 보기위해 멀고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 필자 역시 그 열차를 타고 1만 킬로미터를 달린다. 8회에 걸쳐 그 기록들을 사진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주)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 덧창을 닫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계속 나의 잠을 방해한다. 백야 때문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1. 잠깐 어두워졌다가 밝아 버리는 이때를 불면의 계절이라더니, 정말이다. 이곳에 도착한 후로 제대로 잠을 잔 것은 몇 시간이나 될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청해 보지만 소용없다. 천정에 크고 슬픈 눈을 가진 도머 형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알래스카의 백야 때문에 엿새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이 늙은 형사는 총에 맞은 후 중얼 거렸다. “잠이 오는군. 잠 좀 자게 해주겠나?” 영화 <인썸니아>에서 도머 형사(알 파치노 분)가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사실 알래스카의 백야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 때문이었다. 경찰 직업윤리를 위반하고 증거를 조작한 불법행위와 그 것을 은폐하기 위해 동료를 살해한 행위가 빚어내는 고통스런 불면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행위의 기억들이 불면을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와서 20대를 추억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사랑했지만 볼 수 없었고, 느껴보려 했지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연민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짝사랑이 내 뇌 속 심연에 정신적인 상흔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상흔은 이루고 싶었고 목격하고 싶었던 변혁의 꿈을 날카롭게 배신하고 간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고자 했던 내 의지의 종말 때문이다. 시간은 그 짝사랑의 고통을 중화시켰다. 변혁은 개혁이 되고, 개혁은 개량이 되고, 개량은 권태가 되었다. 나의 불면은 그 일상의 권태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히 호텔 문을 나섰다. 어차피 잠은 오지 않는다. 지갑과 디지털 카메라는 방에 두고 라이카 한 대만 챙겨 나왔다. 6월에서 8월 사이 이곳은 태양이 수평선에서 최저 6.5°, 최고 53.5° 사이에서 뜨고 진다. 자정 넘어 훤한 거리를 보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다. 생체시계는 이미 길을 잃었고,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들어오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선은 사진가의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네바 강변을 걸었다. 표트르 시절에도 네바강변에 병풍처럼 펼쳐진 건축들에 대해 엄격히 관리됐단다. 강 건너로 보이는 건축물은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의 베네치아 풍, 파리풍의 서 유럽식 건축물들이다. 당시 건축할 때 창문 하나하나의 규격도 엄중히 감독했다고 한다. 상허 이태준은 레닌그라드에서 네바강은 훨씬 더 도시를 미화시키고 있다. 일정한 수량으로 뿌듯이 차 흐르는 하면(河面)에는 각 궁()의 즐비한 청, , 백색의 갖은 양식의 건축들이 그림처럼 고요하고 상류를 보나 하류를 보나 역시 평균한 높이의 건물병풍으로 아득히 둘려있다고 했다. 그 풍경이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건물들은 네바강에 반사되어 현란한 색감을 연출한다. 이런 빛은 색온도가 무척 낮아 자주색을 띄게 된다.


천천히 강변 산책로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간간이 사람들이 눈에 띤다. 술에 취한 중년의 사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없이 강물을 응시한다. 아직도 밀회를 나눌 공간을 찾지 못한 것일까? 청춘남녀는 강변을 배회한다. 강 너머로 거대한 황금 돔이 보인다. 이삭 성당이다. 하기야소피아와 베드로 성당을 능가한다는 러시아 최대의 성당이다. 지상에서 100m 높이에 올려진 돔은 100Kg의 황금을 뒤집어쓰고 있다. 화려함으로는 지상 어느 곳의 성당도 견줄 수 없다. 천천히 내 라이카를 들어 파인더에 눈을 댄다. 파인더 안은 자주빛으로 물들어 있다. 자주빛을 뜻하는 영어 퍼플(purple)은 제왕이라는 뜻도 있다. 제왕의 빛으로 물든 도시라! 해석이 좋다. 내 머리 위로 프린스의 노래 제목처럼 퍼플 레인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