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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ㅣ밤은 누군가의 역ㅣ김학중


밤은 누군가의 역 / 김학중

 

밤은 누군가의 역

순진하게 내려와 앉으며 정차하고는

지나간 이름들이 자라 나와 내리는

모든 바닥들

바닥에 시간이 뿌려두고 간 낱알들이 살이 올라

바람 부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서걱거려도 좋은 시간

바닥에 앉아야 기다림이 익지

아무 곳이고 역이 되지

나지막이 다들 내려주고 남는 바닥이야

잠드는 역을 떠나는 막차들은 불을 끄고 천천히 떠나가고

이제 남은 바닥은

흐릿하게

순진한 깊이

마감이 임박한 오늘에게

시간만이 데려다줄 수 있는 안식을 주는 깊이

아직 그날인 누군가

그대 그대로 붙잡아도

어둡기만 한 대답들이 충만해지는

가만히 내려앉아 등 뒤가 되어주는 누군가의 역

등으로 다가가는 일이 밤이라니

그대가 그대로 이날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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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어느새 우리는 누군가의 역으로, 밤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김학중 시인의 밤은 누군가의 역에 잠시 머물러 볼까요. 그는 삶이 스스로의 삶을 두드리던 그 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창세인 시대를 위하여 아무런 선언 없이 선언을 완성하는 언어를 위하여 이것들이 다만 시작으로 무너질지라도. 괜찮다라는 문장을 남긴 바 있습니다.(창세, 시인의 말 중에서) 도저한 의지적 표현은 오늘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주체의 진술에서도 발견되고 있지요. “아무 곳이고 역이 되는 시공간, 세계의 밤. 그리고 그 밤은 누군가의 역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그것은 문득 어둡기만 한 대답들이 충만해지는/가만히 내려앉아 등 뒤가 되어주는 누군가의 역에 머무는 일임과 동시에, “등으로 다가가는 일이 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대가 그대로 이날이었다니.”라는 절망인 듯 환희인, 환희인 듯 절망인 목소리이지요. 시는 움직이는 텍스트입니다. 그럴 때 밤은 누군가의 역이고, 모든 시간이 머무는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시인의 전언에 따라 이 미로에 마주서서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