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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효자정려봉헌전례 및 제1회 죽정 효 한시백일장

'효의 고장' 용인. . . 효자각과 함께 부활










부모에 대한 효, 조상에 대한 효 정신이 점점 퇴색되고 있는 요즘, 효 정신을 되새기게 하는 효자정려 봉헌전례가 지난 19일 처인구 남사면 완장리 전주최씨 판윤공파 선산 효자각 일원에서 3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됐다.


()한국효문화센터(이사장 최종수)와 용인한시협회(회장 이병목)가 주최하고 성균관, 용인문화원, 용인전승문화연구원, 용인신문사 등이 후원한 이번 효자정려봉헌전례 및 제1회 죽정 효 한시백일장행사는 오전 10시 한시백일장을 시작으로 막이 올라 봉헌전례 및 효자각 제막식 행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김영근 성균관장을 비롯해 김교화 처인구청장, 조길생 용인문화원장, 이인영 용인전승문화연구원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효가 백행의 근본임을 깨닫도록 하는 귀한 시간이었음은 물론 용인이 효의 고장임을 알리는 뜻 깊은 자리였다.


이날 효자각에는 용인의 효자 인물 중 가장 오랜 인물이며, 용인 연고자 가운데 효자로 정려된 최초의 인물로 손꼽히는 죽정 최유경 선생을 비롯해 최사위, 최사립, 최덕린, 최덕순 등 효자 5위 현판 정려가 봉헌됐다.


그간 용인에 묘만 있고 정려는 타지에 있던 5인의 효자정려를 이날 한곳에 봉헌한 것은 효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용인을 효의 본고장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다.


최유경 선생의 묘와 사당은 용인 공세동에 있음에도 효자 정려각은 충북에 소재해 있는 등 5인의 효자 정려가 곳곳에 소재해 있었다. 전주최씨 종중은 내년부터 다양한 효 행사를 개최해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나간다는 계획이다.


이번 행사를 추진한 전주최씨 평도공파 직계손 최인태 씨(용인향토문화지킴이 회장)현대사회에 점점 옅어지는 효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영모제 현판을 효자각으로 교체하고 효자정려를 한 곳에 모셨다최유경 할아버지로부터 대대손손 이어지는 조선시대 전주최씨 효자만 89명에 효부열녀가 50여명에 이른다. 부모가 온 효자여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이 있듯이 효자 집안에 효자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부모의 행실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한다. 인간 최초의 교육인 태교가 평생의 자양분이라는 점에서 태교로부터 효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성의 바탕인 효의 전승을 계승하기 위해 내년에는 공세동 최유경 사우 효렴사에서 어린이 청소년 대상 효 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매년 효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를 개최해 나갈 계획임을 밝혔다. 최유경은 평생을 효와 청렴을 실천한 인물로 평도공 사우를 효렴사로 제액한 것은 평소 그의 대명사였던 효성과 청렴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행사는 어느 개인과 가문을 기리는 것이 아닌, 선인들의 효행을 재조명함으로써 용인을 효의 고장으로 재탄생 시키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뜻 깊은 행사다.


그간 용인은 명당이 많아 생거진천, 사거용인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에는 명당이라는 개념보다는 죽은 자의 도시라는 이미지로 이해되곤 하지만, 이번 효자봉헌례를 통해 죽어서도 효를 행하는 효의 고장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유경은 고려 충혜왕 4(1343)~조선 태종 13(1413)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죽정이며 감찰대부 재의 아들로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이 됐다. 한양도성을 지을 때 숭례문 제조로서 업적을 남겼고 시호는 평도다. 평소 효성이 지극했고 청렴강직해 백성에게는 인자하고 권신에 굴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재신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부귀영화를 쫓지 않고 낙향해 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뜨자 묘 옆에 여막을 짓고 6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자 세종은 그의 효자정문을 세웠다. 최유경의 효자 정려각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에 있으며 그의 묘와 사당은 용인 기흥구 공세동에 있다. 효자 효부 열녀에게 정문을 내리기 시작한 게 세종부터였기에 세종 때 효자로 정려된 최유경은 용인의 효자 인물 가운데 최초의 인물로 꼽히는 것이다.


최유경과 그의 아들 최사위와 관련해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유래가 비롯된다는 학술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 2016년 용인문화원에서 주관한 용인의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조선의 유학제하의 학술세미나에서는 이같은 전설의 유래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친을 모시고자 했던 자식의 효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했다. 최사위는 경치가 뛰어난 과천 막계의 원림에 살면서도 돌아간 부친을 생각해 어찌 나 홀로 세상 경치를 즐기랴하며 한 번도 둘러보지 않았다고 전한다.


진천에서 여생을 보낸 최유경은 사후에 용인 기흥구 공세동 일대 사패지에 모셔졌고, 그의 아들 최사위는 3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여막 자리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 자손들은 그 자리에 그의 묘를 썼다. 즉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생전과 같이 부모의 넋을 모시기 위한 것으로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행실이 오늘날까지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진사 최사립은 어머니가 위독하자 단지 수혈 후 그의 어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모친상을 당하자 묘 앞에 초막을 짓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끼니의 제사 음식을 손수 차려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도 똑같았음이 중종실록에 전한다. 특히 병으로 자리에 누운 아버지가 갈화(칡꽃)탕을 먹고 싶다고 하자 수십 일을 정성껏 기도해 한 겨울에 칡꽃을 피우게 했다는 일화까지 남기고 있다. 또 사립은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수박을 먹고 싶어 했으나 이를 구하지 못해 생을 마칠 때까지 수박을 먹지 않았으며, 여름철에 수박을 보면 슬피 울었다고도 전해진다. 최덕린, 최덕순 형제 또한 효성과 형제애가 두터워 이를 칭송하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봄기운이 완연하고 효자각 옆 벚꽃나무가 만개한 가운데 그림처럼 펼쳐진 이날 행사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효 정신의 아름다움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심규순 명지대 무용과 교수의 헌무와 백암농악보존회의 풍물이 선보였으며, 서울 경기지역의 시인 50여명이 참여한 한시백일장에서 장원은 용인 수지에 거주하는 장성집 씨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