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공간
안 희 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 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안희연의 시는 소멸과 몰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어두운 세계의 삶 속에서 쓰여진다. 소멸하는 것은 그녀의 세계며 몰락하는 것은 그녀를 그녀이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소멸과 몰락의 세계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어두운 세계에는 폭력과 불의 혹은 지배논리와 구조적 모순이라는 근원적인 부정성에 편입되어버린 세계를 의미하는 바 그녀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자체다. 그녀의 시가 실종된 삶과 삶 자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그녀의 시편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존재방식 일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안희연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단 한 권의 시집을 갖고 싶어 한다. 언어로 쓰여 졌지만 쓰여지지 않은 시의 원형질의 시편으로 된 시집은 그녀의 로망이다. 그걸 위해서 밤마다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 새로운 시어들을 고르는 것이다. 김윤배/시인<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