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미
이경림
너는 젊고 아름답다
너는 젊고 웃는다
너는 젊고 웃지 않는다
언제부터 너는 젊고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너는 웃고 아름답지 않는다
언제부터 너는 웃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다
그리고
너의 칠요일은 온다
아침이 오지 않는다 저녁이 오지 않는다
저녁만 시작된다 아침만 시작될 것처럼
더듬더듬
한 이파리씩
이경림은 장미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다. 장미를 향해 ‘너는 젊고 아름답다/너는 젊고 웃는다’라고 노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취 이상이다. 그러나 장미는 도취에 머물게만 하지는 않는다. 장미는 쉬운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유자철망을 치고 있다. 그것이 가시다. 가시가 있어 새침하고, 새침해서 언제나 웃어주는 것은 아니다.
장미에 그녀의 서정이 얹히는 순간, 그녀는 이미 장미였으니 새침해지는 것은 그녀이기도 하다. 장미는 언제부턴가 젊었고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언제부터 웃고 아름답지 않는다/언제부터 웃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다’고 아름다움의 연원과 아름답지 않음의 연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웃고 있지만 아름답지 않은 장미는 이제 아름다움의 절정을 지나기 시작한 장미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했으니 장미인들 다르겠는가.
‘아름답지 않는다’는 문장은 불편하다. ‘아름답다’가 형용사이니 ‘않다’로 쓰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 모른다. ‘않다’는 형용사의 부정적 표현이고 ‘않는다’는 동사의 부정적 표현인 것을 모를리 없는 그녀가 굳이 ‘아름답지 않는다’라고 쓴 이유는 ‘아름답다’를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본 것이어서 놀랍다.
장미는 이제 칠요일을 맞게 된다. 칠요일은 장미의 마지막 아름다움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붉은 꽃닢으로 일곱 번째 날을 맞는 장미는 낙화의 순간을 향해서 그늘을 밟아가는 것이다. '너의 칠요일은 온다‘고 노래하는 그녀는 장미보다 먼저 칠요일을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미에게도 인간에게도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까 순명으로 이를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칠요일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늦게 맞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아침이 오지 않고 저녁이 오지 않는 정지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아니다. 어두운 시간인 저녁이 시작 되는 것이다. ‘더듬더듬/한 이파리씩’ 뛰어내리는 낙화의 시간이다.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