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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사람 용인愛

고향이란

안재성(소설가)



[용인신문] 내 고향은 영동고속도로 양지교차로에서 백암 쪽으로 5리쯤 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이다. 옛주소가 용인군 내사면 제일리 산매동 새말이었다. 산에 매화가 많아서 산매동이요,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말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매화 같은 건 본적도 없고 새로 지은 집도 없던 가난한 시골이었다.


지금은 온통 아름다운 전원주택들이 들어서서 첩첩산골 갑갑했던 그 옛날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어렸을 때는 사실 고향산천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멀리 5리 길을 걸어 제일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산길은 헐벗어 미끄럽고,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산등성이를 따라 놀다보면 불쑥 불쑥 나타나는 묘지들도 무서웠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가 물려받은 땅이라곤 논 400평과 1000평 조금 넘는 야산뿐, 외할아버지가 사준 350평짜리 밭까지 다해도 4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벅찼다. 시흥군 군포의 부농의 딸이던 어머니는 큰아들인 나를 1년에 몇 달씩 군포 외가에 보내 글과 숫자도 배우고 살도 찌게 했다.


외가 식구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푸근해지는 좋은 분들이었다. 시흥군 군의원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내외와 대학 나온 외삼촌과 이모들 모두 더없이 밝고 공정하고 다정한 분들이었다. 소고기에 과일에 언제나 먹을 것도 풍부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저녁만 되면 우울해져서 해 저무는 안양천변 들판을 내려다보며 용인 집을 그리워했다. 전등도 없는 깜깜한 밤, 이불 속에서 동생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도 그리웠고, 산밤이며 산딸기, 진달래로 굶주린 배를 채우러 사촌들과 이산 저산 돌아다니는 것도 그리웠다. 고향이란 그런 곳인가 보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8살 때 용인 땅을 떠나 서울, 강원도, 안산, 인천 등지를 떠돌다가 1998년 양지에서 멀지 않은 이천 땅에 내려와 자리 잡고 산지 20년째다. 따지고 보면 고향에서 산것은 겨우 8년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 3분의 1은 군포 외가에서 보냈으니 고향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하지만 요즘도 1년에 10번 이상은 고향에 간다. 할아버지 내외 제사며 양대 명절과 시제는 기본이고, 커다랗게 조성해 놓은 문중묘소의 잔디 제초며 묘지 관리를 위해 여름마다 4,5번은 간다. 양지와 용인 시내 사이에 있는 용인장례식장에도 여러번 갔다.


문중묘지 관리는 가까이 사는 죄로 떠맡은 무료봉사지만, 불만은 조금도 없다. 그렇게 자주 가면서도 갈 때마다 옛 생각이 떠올라 기분이 좋고, 봉분이 52개나 되는 조상의 묘를 무상으로 관리한다는 자부심에 은근히 기분이 좋다. 고향이란 그런 곳인가 보다.


남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는 게 소설가의 본분이라는 의식에 충실했던 나는 생전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본 적이 없었다. 굳이 나열하자면 용인 농촌에서의 생활부터 도시 변두리 노동자 가족으로서의 삶,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두 번의 감옥살이와 수십 번의 유치장 살이, 이천으로 귀농한 후 겪었던 온갖 경험이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했겠지만, 30권 가까이 책을 쓰면서도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 가을, 흔한 관절 류마티스가 아니라 전신 근육 류마티스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고 입원해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난 후였다. 퇴원은 했어도 쉽게 치료가 되는 병은 아니라 집에 갇혀 지독한 통증을 견디고 있으려니 두 차례나 지독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감옥살이에 고문에 탄광생활까지 별 고통을 다 겪었어도 당당하고 이성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진짜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했다.


우울증, 정말 무섭다. 아무리 즐거운 영화를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토록 사랑스런 손자들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고, 동해바다니 서해바다니 여행을 다녀 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오로지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 방법만 연구했다.


이때 생각난 것이 고향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니 조금씩 우울함이 가시는 것이었다. 고향 산천에 대한 묘사와 어린 시절 친구들 이야기, 처음 서울에 올라갔다가 집을 잃어버린 이야기, 지금도 너무나 좋아하는 나의 사촌 재섭이 형 이야기를 쓰다 보니 어느 날 아침 우울증에서 벗어나 버린 나를 발견했다. 고향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고향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지난달 하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제사를 지내려고 제일리 문중묘지에 갔었다. 식구들과 함께 간단한 제사를 마치고 큰어머니를 모시고 상호가 우리소이던가, 사거리의 큰 식당에 가서 평양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은 심심하다던 큰어머니가 드셔보더니 참 시원하고도 담백하니 좋다고 하신다. 사실은 내가 먹어본 중 최고로 맛있는 평양냉면이다. 밤이면 깜깜해서 옆집도 가기 싫던 그 첩첩산중 촌구석에서 이런 냉면을 먹을 수 있게 되다니, 세상은 분명 좋은 쪽으로 발전하고 있나 보다.


한때 수십 가구의 순흥 안 씨가 모여 살던 제일리 일대에 남은 안씨 어른은 딱 두 분뿐이다. 내가 이천으로 처음 내려왔을 때만해도 명절에 가면 일곱 집까지 절을 하러 다녔는데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큰어머니와 그리고 오촌 아저씨 한분밖에 안 계신다.


명절에 절을 할 분이 하나도 안 남게 되면 참으로 슬프고 쓸쓸할 것이다. 두 분이라도 오래 오래 건강히 살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