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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친일 막말 여전한 대한민국... 일제 매국노들 웃는다

친일인명사전 오른 용인출신 인물들
송병준 부자·박제순·신현태·이윤영
이풍한·최재익·심형구 등 민족 배반


       


[용인신문] 올 한해를 연일 뜨겁게 달굴 것 같던 3.1운동 100주년도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잠잠해지는 듯 하다. 독립운동가와 항일투쟁사를 기억했던 100주년이 다 가기 전에 다시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 친일에 대한 흔적이다.


용인에 매국노 이완용의 땅이 남아있고, 이완용 버금가게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으려 했던 송병준과 그 아들 송종헌이 살았던 99칸 별장터가 있다. 또 친일 미술계를 주도한 선봉장으로 일컬어지는 심형구와 일제에 부역한 성악가 김자경 부부 묘도 남아있다. 프로문학가 안막과 친일 논란이 있는 무용가 최승희 부부의 살림집이 원삼면 문촌리에 남아있기도 하다. 어쩌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용인 출신 친일파들이 있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들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지도 모른다.


3.1운동 100주년의 해가 저물기 전에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친일파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용인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과 친일예술인을 살펴본다.


송종헌(1876~1949)은 양지에서 태어났다. 한일합병의 공으로 자작지위를 받았고 일진회를 만든 송병준의 장남으로 일제시대 직함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주형이고, 일본 이름은 야전종헌(野田鍾憲)이다. 1889년 무관학교를 졸업했고, 1904년 일진회 평의원을 시작으로 양지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양지군 참사, 조선농업주식회사 이사 겸 감사, 용인지방금융조합 감사,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 중앙신탁주식회사 감사로 활동했다.


1921년 송병준과 조선소작인상조회를 조직했다.


송병준은 노다 대감으로 불렸다. 송병준은 노다 헤이치로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개명했다. 송병준은 이토히로부미를 직접 찾아가 15000만엔에 조선을 팔겠다고 제안했던 인물로 정미칠적이다. 악날하게 재산을 긁어모아 지금도 전국에 땅이 수천만평에 달했다. 그 아들 송종헌은 1925년에 송병준이 사망하자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후 경성금융주식회사 이사, 1930년 국민협회 회장, 민중신문(국민협회 기관지) 사장, 1932년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고, 1937년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1938년 대동일진회의 고문, 그후 대동일진회 산하 동학원 원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조선귀족회 이사, 1944년 재단법인 창복회 위원, 19453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직을 맡았다. 해방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친일반민족행위로 친일사전에 수록됐다.


박제순(1858~1916)은 호는 평재이고 참정 박흥수의 아들이다. 1899년 궁내부철도용달회사 사장을 맡았고 1910년 귀족은행(저축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1883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시작으로 관직에 들어가 그후 성균관 대사성, 호조참판, 이조참판, 농상공부대신에 이어 대한제국기에는 외부대신, 육군참장 등을 지냈다. 특히 1905년 외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문에 조인해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조선총독부 충추원 고문, 경학원 대제학에 임명됐다. 이문회(以文會) 회장,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으로 활동했다. 친일반민족행위로 친일사전에 수록됐다.


신현태1908년 관립농림학교 졸업 후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전남 고흥군수, 경기도 장단군수, 여주군수, 이천군수를 이어갔다. 1928년에는 훈6등 서보장과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그후 경기도의원(이천), 경기국방의회연합회 이사, 이천소득세조사위원회 위원, 이천상공회 회장, 이천금융조합장 등을 맡았고, 1937년 국방헌금 헌납, 이천군번영회 회장, 1940년 기원2600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됨.


이윤영1907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를 졸업하고 탁지부 세무주사, 죽산군수를 지냈고,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그후 가평군수, 1916년에는 소방기구 구입비 기부 공로로 목배를 받았다. 1923년부터 28년까지 용인군 내서면장, 1928년 용수흥농주식회사 취체역이 됐고, 같은 해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경기도평의회원당선, 이후 용인금융조합장, 용인연초경작조합장을 맡았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됨.


이풍한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졸업했고, 1910년 남작 이종건의 양자, 1914년 상속자가 됐다. 3.1운동후 이종건은 작위를 반납하려 했으나 이종건 사후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의 수익금을 그대로 계승했다. 고양, 안성, 여주, 용인, 포천 등지에 논밭을 합쳐 200정보를 소유했다. 1937년 국방헌금 2,000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고, 군용비행기 건조비 300원 헌납, 일제가 홍콩을 점령하자 육해군에 2,000원 헌납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됐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됨.


최재익1908년 탁지부 토지측량강습소를 졸업하고 임시재원조사국, 임시재산정리국, 재무감독국, 토지조사국 등의 기수로 활동했다. 강제 합병 후에는 충북 단양군수, 보은군수, 제천군수, 1937년 제천산업조합장이 됐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이들 외에도 일제강점기 용인에는 대지주 등 재력가가 존재했다.


심형구는 예술계에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일본에 부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프라노 김자경의 남편으로 이화여대 미대교수와 박물관장을 지낸 심형구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잡지 신시대에 미술도 군국주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친일글을 발표하는 등 친일행위에 적극적이었다. 친일단체와 친일미술인 모임 등에서도 활동했고, 흥아를 지킨다, 기관총을 쏘는 병사 등 친일작품도 많이 남겼다. 친일작품과는 별개로 화풍 자체가 일본풍이라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