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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김대건 신부 ‘용인 태생설’ 출생지 진실 밝혀야

2021년 탄생 200주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
조선왕실기록 일성록 ‘용인태생’ 기록발견 연구필요

 

[용인신문] 오는 20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용인 태생이라는 설에 대한 용인 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연구 조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신부를 선정함에 따라 이를 앞두고 조사 연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뿐만 아니라 용인시도 김대건 신부가 최초로 미사를 집전한 은이성지를 향토문화재로 신청하고 은이성지에서 안성 미리내 성지로 이어지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하고 있느니만큼 김대건 신부의 용인 태생 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김대건 신부는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정설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조선시대 왕실 기록물인 일성록에 김대건 신부 스스로가 자신을 용인태생이라고 증언한 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용인출생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성록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관찬 사서의 하나로 국보 제153호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이 기록물 가운데 헌종 12년(1846) 5월 30일 자 공초계, 즉 김대건을 취조한 내용을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에 따르면 김대건(본명 재복) 스스로가 용인에서 태어났다고 밝혔음을 명시하고 있다.

 

즉 “朝鮮龍仁地胎生 姓金名再福(조선 용인 땅 태생. 성은 김이며 이름은 재복)”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金大建我國龍仁胎生隨入洋人解得方語而思慕故國獨自出來納告渠果是龍仁胎生則卽金濟俊之子也(김대건은 우리나라 용인 태생이며 서양 사람을 따라 들어가 서양말을 해득하고 고국이 그리워 홀로 나왔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는 용인 태생으로 즉 김제준의 아들입니다.)”라고 명기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같은 ‘일성록’의 기록 중에도 당진에서 이주해 온 아버지 김제준에 관해서는 ‘그는 용인에 산다(渠居生于龍仁)’, 즉 ‘거생(居生)’으로 표기하면서도, 김대건 신부에 대해서는 ‘용인 땅에서 태어났다’는 ‘용인지태생(龍仁地胎生)’으로 표기한 점이다.

 

‘헌종실록’에도 ‘대건은 용인사람’(大建以龍仁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정사(正史)에 해당하는 관찬 기록에는 모두 ‘용인 태생’, 또는 ‘용인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당진 솔뫼 출신이라는 자료들은 일성록처럼 김대건 스스로가 말한 게 아니다. 제3자들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부모나 조상이 살아온 곳을 가리켜 어디어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가 용인에서 태어났어도 주위 사람들은 그를 당진 사람으로 인식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 자료는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3일 신학생 선서를 받고 조선신학교 교장에게 보낸 서한으로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의 김 안드레아(김대건의 세례명)’라고 표현한 것과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쓴 ‘순교자들의 행적’ 기록에 ‘안드레아는 1821년 8월에 충청도에서 출생하였다’라고 표기한 것 등이다.

 

한편, 이같은 출생관련 기록 외에도 김대건이 출생한 1821년 훨씬 이전에 부모가 당진을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도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다.

 

일단 김대건이 1827년 7세에 당진을 떠났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기에 이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7세 때인 1827년 정해박해(丁亥迫害)를 피해 고향 솔뫼를 떠나 유랑하다가 서울 청파동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다시 경기도 용인시 이동읍 묵리 한덕동을 거쳐 조부가 사망한 뒤 양지면 골배마실로 이주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정해박해는 전라도 곡성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충청도 당진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는 기존의 시각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또 증조부가 1814년 옥사했고 종조부가 고향을 떠나 경상도 안동 우련밭에서 17년 동안 숨어 지내다 1816년에 옥사를 한 것으로 미뤄보아 늦어도 그즈음 당진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집안 사람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순교하는 상황에서 김대건의 조부와 부친만 온전했을 리 없고,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면서 1827년까지 고향에 남아 있었을 까닭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 가톨릭계와 학계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출생설에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특별히 쟁점화 시키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현재 솔뫼 성지는 전주교구에 속해 있고, 은이 성지는 수원교구 관할이다. 교구 관할이 전혀 다르니만큼 종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당연히 종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 가톨릭계에서 연구해야 할 부분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생 200주년과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만큼 용인시의 연구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건 신부는 출생지 여하를 떠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은 인물인데다 그가 최초로 미사를 집전했던 은이성지 역시 조선 천주교회사의 최초 본당으로 용인 양지면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더구나 은이성지에는 지난 2015년, 김대건 신부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던 중국 상해의 김가항성당이 이전 복원돼 있기도 하다.

 

매년 여름에는 이곳 은이성지에서 안성 미리내성지까지 도보순례를 하는 천주교 신자가 줄을 잇고 있다. 묵리에서 안성 미리내성지에 이르는 애덕고개는 서울 새남터에서 효수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비밀리에 운구 되던 곳으로 천주교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지순례길이다.

 

이같은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며 중요한 지역에 대해 올바른 역사 정립의 필요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