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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시인의 감동이 있는 시

몽유강천보기ㅣ김인자

몽유강천보기

                            김인자

 

불안을 내려놓자 낮은 신음소리 달려가던 강은 물비린내로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깊다는 건 넓이를 어둠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높고 깊고 소스라치게 그윽한, 그럴지라도 생각과 몸이 기우는 곳은 여전히 당신입니다 풀잎을 흔들던 바람은 기어이 가을을 문 앞에 세우고야 말았습니다 구름 사이로 귀소하던 두루미 떼의 유연한 비상을 보았던가요 눈 앞에 강은 그대로인데 몽유라면 이 같은 그림을 눈앞에 전개한 자연과 살아 있음을 감사로 전언하는 당신이야말로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황홀한 몽유지요

 

산그늘이 깊어지네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 10년이 어제 같은데 가을장미는 이미 건너가고 없는 로맨스라 했던가요 잠에서 깨어 아랫도리를 흥건하게 적시던 그날 아침은 한 번도 입맞춤 해보지 못한 당신의 향기가 나의 꽃밭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 향기 때문에 나는 오래 어지러웠고 뻔한 길을 헤매야 했지요 향기를 따라가다 보니 꽃밭에서 멀어지거나 터무니없이 가까워지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고요 칼날 같은 통증이 가슴을 스칠 때마다 꽃들은 불꽃처럼 솟구쳤고 홀로 그 넓은 꽃밭을 지키는 일은 형벌 같았습니다 다시 밤이 오고 아침이 와도 그 꽃밭에 남은 당신의 향기는 여전했답니다 당신과 내가 원하는 그곳에 닿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비로소 꽃도 시들고 향기고 사라졌다지요

 

김인자는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같은 해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겨울 판화』『나는 열고 싶다』『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슬픈 농담』외 다수의 여행기와 산문집을 냈다.

 

「몽유강천보기」는 여주 강천의 남한강을 꿈꾸듯 보며 강물처럼 흘러간 사랑을 노래한 시다. 깊게 흐르는 강물에서 보는 당신은‘높고 깊고 소스라치게 그윽한, 그럴지라도 생각과 몸이 기우는 곳은 여전히 당신’이다. 아름다운 고백이다. 그러니까 몽유다. 가을이 오고 귀소를 위한 두루미 떼의 유연한 비상을 담아내는 강물이 이미 몽유지만‘당신이야말로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황홀한 몽유’인 것이다.

 

눈 한 번 감았다 떴는데 10년이 흘렀고, 그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고뇌와 그리움이 있었는지를 숨기지 않아도 될 일이어서‘당신의 향기는 나의 꽃밭에 흘러넘쳤’던 것이다. 드넓은 꽃밭은 드넗은 당신의 사랑이기도 한 것이지만 불타오르는 꽃밭이기도 하다. 그 꽃밭을 지키는 일이 형벌이었던 10년이다. 그러나 그처럼 뜨겁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꽃도 시들고 향기도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사랑이 생멸의 길을 간다. <리토피아> 간『당신이라는 갸륵』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