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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사람 용인愛

꽃 세상의 나, 죽전로

안수연(동화작가, 문학박사)

 

[용인신문]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도서관 열람실의 책들 속에서 나의 20대를 만났다. 그때 친구들 이름을 되뇌어본다. 20대의 감성에 젖어 수필집을 두 권 챙겼다. 두 번째 스무 살을 즐기고 있는 나는 도서관을 나와, 폭포공원을 걸어 올라갔다. 인공 연못에는 노란 붓꽃들이 하늘거리고, 원두막 정자에는 청춘 남녀들이 “하하, 호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투명한 하늘 아래 쉼을 즐기고 있는 사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어머님께서 다리 연골 수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아버님께 전화를 걸었다.

 

“니네들 걱정할까봐서. 엄마와 아빠가 몰래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니네들까지 알게 되었구나. 네 건강이 더 걱정이니 아무 걱정 말거라.”

 

팔순을 앞둔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멀리 있기에 늘 집안일에 마음만 앞선 나를 염려해서 내린 결정이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울대에 눈물이 걸려 묵직하기 그지없다.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의식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전화를 끊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걸어 내려갔다. 대지고등학교 앞 전내 교차로를 지나 벚꽃 나무가 만들어 낸 터널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지나가고,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이 지나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빨간 장미가 활짝 핀 사이에 백장미가 시선을 끌었기 때문에. 유난히 크고 선명한 하얀 꽃송이가 수술을 받고 계시는 시어머니의 미소와 겹쳤다. 행여나 며느리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꾸지람을 못하시는 어머니, 안부 전화를 드릴 때마다 마음 편하게 살라고 늘 조언해주시는 어머니, 깊은 밤에도 깜빡 잠을 주무시는 어머니가 병원에서 한 달을 어떻게 보내실까.

 

그때다. 하얀 백장미가 나에게 인사하듯 살짝 흔들렸다. 나도 다가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우리 어머니 무사히 낫게 해줘.’ 가까이 있기에 자세히 보지 못했던 쑥부쟁이, 붉은 토끼풀, 금계국 꽃들에게 마음의 인사를 건넸다. 무심히 지나쳤던 꽃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죽전로에는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담벼락을 오르려고 애쓰는 담쟁이를 지나, 빨간 장미꽃으로 뒤덮은 돌담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하얀 아이스박스가 대문을 막고 있었다. 친정 엄마가 보낸 택배였다. 내용물은 무려 9종 세트 김치와 밑반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아버님과 두 어머님, 감사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스무 살의 청춘을 굳이 되찾고 싶지는 않다. 이미 사랑으로 둘러싸인 꽃 세상 속에 두 번째 스무 살을 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