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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문화유산 산책

매국노 송병준 별저 전통정원 ‘영화지’ 잡풀만 무성

긴급진단 _ 용인지역 ‘근대문화유산’이 사라진다 - 中

남양주에 이전 복원돼 있는 송병준의 99칸 집

 

영화지의 1920년대의 모습


송병준 99칸 별저 중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못이 방치돼 있는 모습

 

영화지 팔각정의 남아있는 주춧돌

 

송병준 별장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은 의병의 공격대상지였음을 알리고 있다.

 

일진회장 지낸 대표적 친일파 ‘정미칠적’
양지면 추계리 대저택 송두리채 사라져
영화지 보존 일제 산교육의 장 활용해야

 

[용인신문] 정미칠적가운데 한명인 일진회장 송병준(1857~1925)의 99칸 별저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전통정원 ‘영화지’가 무관심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이에 대한 보전 대책이 시급하다.

 

용인시 행정당국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버렸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대책 마련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양지면 추계리에 남아있는 영화지를 보존해 일제강점기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일제의 보호 아래 부귀영화를 누리며 식민침탈 정책에 앞장서 온 송병준의 99칸 별장은 이미 오간데 없이 사라진 지 오래이고, 간신히 남아있던 솟을 대문과 길게 늘어서 있던 행랑채마저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몽땅 사라져버린 근대역사의 한 귀퉁이를 간신히 지키고 있는 연못은 흔적은 남아 있으나 방치돼 있는 바람에 바로 앞에 두고도 찾느라 방황해야 할 정도다.

 

송병준 99칸 별저는 의병장과 독립투사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거나 혹은 의병장을 잡으러 다니던 친일파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의병의 공격 대상지가 되기도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좀 더 일찍이 이곳에 대한 보존 방안이 마련됐다면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단 하나 남아있는 전통정원인 영화지조차 내동댕이쳐진 채 언젠가는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게 될 것이고 기억에서도 완전히 잊혀지게 될 것이 뻔하다.

 

#영화지

영화지(映華池)는 꽃이 물에 비친다는 이름을 가진 연못으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239번지 송병준 별저 진입로 우측에 조성된 조선시대 전통정원이다.

 

송병준은 일제 강점기에 이완용과 더불어 친일매국노를 대표한다. 송병준이 1890년 양지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고종이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99칸 별장을 지으면서 전통정원 영화지도 함께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곳 전통정원에는 송병준의 친일 행각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제가 헌정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 원산의 금송(수령 100년 이상 예상)이 둘레 3미터 넘게 자라고 있다.

 

송병준 별저는 99칸으로 지어진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별저는 광복 후 소유주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건물이 모두 헐리고 현재는 온누리세계선교센터가 거대하게 신축돼 있는 가운데 영화지는 방치되다시피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당초 99칸 저택의 동쪽 숲과 연해 있는 영화지는 현재 연못 가운데 있는 섬과 연못가에 지어졌던 정자의 초석과 함께 전체적인 구조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조선시대 민간 정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원 영화지는 크게 못과 섬, 그리고 못을 감싸고 있는 숲으로 구성돼 있다. 영화지는 지세를 이용해 서쪽 계류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여 인공샘을 조성하고 그곳에 작은 못을 만들어 아래쪽 큰 못과 8자형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형태다. 큰 못 가운데 둥그런 섬을 조성하고 정자와 소나무를 심었다. 북쪽 숲과 연결되는 철제 다리가 남아있다. 영화지 북편 정자가 있던 자리에 주춧돌이 남아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8각의 주춧돌은 모서리마다 2개씩 16개가 박혀있고 가우데 2개가 세워져 있어 팔각정이 확실하다.

 

이 일대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썼던 용인문화원 김장환 사무국장은 “소쇄원, 식영정 등 우리나라 전통정원이 전라도와 경상도에 집중 분포돼 있고 충청도 지방의 일부 고택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경기도에는 능원이나 묘원 외에 이렇다할 민간 정원이 없다. 영화지는 경기도 지방의 민간 정원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북편 정자도 옛 사진으로 보면 2, 3단의 장식기와를 세운 절병통 구조를 했다. 영화지는 우리나라 전통정원 조성기법에 의해 축조된 정원을 대표하는 구조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며 “수십년 동안 방치된 영화지가 사유지인 관계로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급히 지방 문화재로 지정해 정밀한 지표조사를 통해 전통정원의 원형을 살려 정비하고 보존할 것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김명섭 위례연구소 연구실장도 오래전부터 송병준의 친일 행적을 상징하는 별저의 부속 시설인 이곳 영화지를 보존해 교육의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친일매국의 상징인 송병준 99칸 별저

송병준의 99칸 별저는 현재 남양주로 이전 복원돼 남아있다. 남양주에 조선 영조의 막내딸 화길옹주가 살았던 집인 궁집(남양주시 평내로 9)에 송병준의 99칸 집이 이전 복원돼 있으며 이 집은 용인집으로 불리고 있다.

 

김태근 용인학연구소장은 “99칸 별저는 80년대말까지 남아있었고 행랑채와 솟을대문은 2000년대 초반까지 남아있었다”며 “당시 별저를 보존하지 못한 채 송두리째 사라지게 한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현재 송병준 별저터에는 표지판만이 길 옆에 달랑 남아있고, 주변은 하천공사, 전원주택 공사용 덤프트럭과 포크레인으로 시끄럽다.

 

99칸 대저택의 주인 송병준이 1925년 뇌일혈로 사망하자 저택은 그의 아들 송종헌에게 넘어갔다.

 

송종헌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상속받은 전국 각지의 토지를 관리하며 용인군 내사면(양지면)을 무대로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그러나 광복은 당대 최대 친일 세도가로 행세하던 송병준 일가에게는 파멸을 뜻했다. 아들 송종헌은 광복 직후 별저와 전답을 급히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99칸 별저 사라지다

6.25 전쟁 때 99칸 집에 피난민이 집단 거주하기도 했다. 김장환 사무국장은 “이곳 별저에는 지하실이 넓게 존재해 있던 것 같다”며 “6.25 전쟁 중에 별저로 피신했던 한 할머니가 별저 지하실이 미로 같았다. 통로가 하도 미로여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미로가 파여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전쟁 이후에는 한동안 상이군인 수용소로 사용됐고, 1950년대 중반부터 성이 차(車)씨인 사람이 저택을 구입해 전쟁 고아원으로 사용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

 

1970년대 초반에 영락교회 정리숙 권사가 저택을 구입해 기독교수양관으로 꾸며놓고 뒤쪽 산기슭에는 낙원벧엘교회를 설립해 운영했다. 낙원이라는 교회 명칭은 종로 2가에 있는 낙원빌딩의 대표인 선우영빈(일본이름 하야시, 깡패)의 고향인 평양의 낙원동에서 따온 것이다.

 

추계리 산84-1번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도 정리숙 권사가 11만평의 토지를 기증해 1989년 설립된 것이다.

 

이후 저택은 온누리선교원으로 넘어갔고 낙원벧엘교회도 온누리벧엘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온누리선교원은 1990년대 저택을 허물고 현대식 강의용 건물과 행정실 등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을 지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 덩그라니 남아있던 솟을 대문도 어느틈엔가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