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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公器)를 거부하고 협잡(挾雜)하는 ‘언론’

오룡(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용인신문] 1919년 2월 26일.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안국동 보성사에서 독립 선언서를 인쇄 중이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이 이를 발견했다. 최린이 신철을 만나서 돈을 주며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라고 묻고는 “제발 며칠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돈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나 신철은 이를 묵인한다. 체포된 신철은 유치장에서 숨겨뒀던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루스벨트여! 귀가 있으면 들어보라. 내가 윌슨의 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역적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던 최린이 한 말이다.

 

그는 “내선융합(內鮮融合)·공존공영(共存共榮)이 민족 갱생의 유일한 길”이라며, 중추원 시국 강연 반으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전국을 누볐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으로 그 역할에 충실했던 최린은 ‘악의 평범함‘을 넘어선 민족 반역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참회를 했다지만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776년 4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 첫날부터 조정의 노론 대신들을 향해 선전포고했다. 5군영을 친위군처럼 사용하고, 시전 상인과 결탁해 권력을 장악해 온 기득권 집단 노론은 경악했다. 사도세자 사후 세손이었던 정조의 목숨은 불안했다,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됐음에도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왕위에 오른 정조. 그는 등극하자마자 내뱉은 말을 즉각적으로 실천했다. 백 년 넘은 노론의 카르텔을 깨기 위해 정조는 좌고우면 하지 않았다. 기득권의 저항을 단호하고 확실하게 척결했다. 노론은 물론 외척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했다. 이종사촌 정후겸, 외할아버지 홍봉한, 홍인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도 제거했다.

 

52년 영조 집권 시기 깐부를 형성해 온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현재의 언론과 검찰)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노론의 눈치나 보며 그들과 한패가 된 부도덕한 적폐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24년 동안 이어진 정조의 개혁 정치는 멈출 수 없었다. 문제는 정조의 건강이었다. 1800년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조선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노론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11살의 어린 순조 뒤에서 수렴청정한 정순왕후는 복수하듯 정조가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이어진 헌종, 철종 대까지 계속된 60년 세도정치와 노론의 200년 일당 독재의 폐해는 조선의 백성들을 곡(哭)소리 나게 했다.주역 64괘 중 정조가 가장 좋아했다는 ‘화천대유’(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는다)의 이름을 가진 회사로 인해 온갖 모략과 가짜뉴스가 넘쳐난다.

 

표현이 권력인 세상이라지만 대한민국 언론은 공기(公器)를 거부하고 협잡(挾雜)을 지향한다. 상대의 언어를 통제하기 위해 먼저 치고 빠져 버리는 못된 습성은 갈수록 난장(亂場)이다.

사족. 의도된 난장(亂場)의 피해는 5년 후에 나타날 것이다. 앞선 역사에서 그나마 배운 것이라면,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