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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시인의 감동이 있는 시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ㅣ이종민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

                                             이종민

 

저 산 깊은 곳 아무도 가지 못한 골짜기에 잎 대신 종이가 자라는 나무 한 그루 있다고 한다

 

손끝을 베어 주렁주렁 매달린 종이마다 글씨를 쓸 거라고 그가 풀밭을 밟으며 말한다

 

나는 그러면 반창고에 연고를 발라 그가 쓴 글씨 위에 붙여 두겠다고 들려주고 싶었지만

 

이종민은 2015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과 선명한 감각이 어우러진 개성적인 어법의 시세계를 보여왔다. 그의 첫 시집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에는 물의 이미지가 자주 출현한다. 물은 시인의 의식에 스며드는 세상 사물들이며 세상을 응시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정밀하고 투명한 언어로 지나온 삶의 흔적들을 담백하게 표출한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인식하는 시적 사유의 힘이 진솔한 울림과 공감을 갖게 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는 현실을 향한 비애이거나 우울의 작은 조각이기도 하다.

 

「중턱에서 발견된 페이지」는 현실의 문법이기보다는 상상의 문법이다. 아무도 가지 못한 골짜기에 나뭇잎 대신 흰 종이가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문장이 그렇다. 그 종이에 손끝을 베어 혈서를 쓸 거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니까 종이를 매달고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말한 것도 그 친구다. 화자는 그렇다면 반창고에 연고를 발라 친구가 쓴 혈서 위에 붙여 두겠다고 말하려다 그만둔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 창비 간 『오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중에서. 김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