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순자荀子는 순자荀子 대략大略편에서 말한다. 백성들이 잘살지 않는데 어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不富 無以養民情>?라며 정치의 요체는 거두절미하고,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이인里人편에서 부자이면서 귀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원하는 바<富與貴是人之所欲>라고 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세월을 살다간 관자는 관자管子 팔관八觀편에서 백성들을 제 몸처럼 아낀다고 떠들어대는 그런류의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 꽤나도 쓴소리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치 지도자들이> 부자이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고國庫를 낭비하게 될 것이고, <그로인해> 백성들은 가난하게 된다. 백성들이 가난해지면 정치지도자들은 온갖 간사한 꾀와 감언으로 백성을 어지럽힌다. 관자 목민 편은 말한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倉庫實而知禮節>, 의식이 족해야 명예도 아나니<衣食足而知榮辱>, 예는 돈이 있어야 생기고 돈이 없으면 없어진다<禮生於有而廢於無>. 여기서 의문은 주住다. 관자는 왜 살집을 말하지 않았을까. 설원을 쓴 유향의 표현을 빌
[용인신문] 목민심서 권5 이전吏典육조六條 제1장 아전을 단속한다는 속리束吏편에서 말한다. 아전을 단속하는 근본은 목민관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다스리는데 있으며 자기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될 것이고, 자기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하여도 시행되지 못할 것이다<속리지본束吏之本 재어율기在於律己 기신정其身正 불령이행不令而行 기신부정其身不正 수령불행雖令不行>. 속리지본이라는 말은 아랫사람을 잘 다스리라는 범중엄의 말로 대 문장가 구양수가 판관 포청천이 개봉부 판관으로 3년을 마치고 후임으로 가서 전임 판관 포청천의 개작두, 용작두, 호작두가 너무 잔혹 하다하여 철폐하면서 천하에 알려진 말이다. 물론 출전은 훨씬 이전부터 관아의 이언이었다. 그만큼 고을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기에 앞서 자신의 몸가짐을 먼저 살펴보라는 경책인 셈이다. 고을 수령이 된다는 것은 백성을 다스린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 성과 패는 먼저 백성을 관리 감독하는 아전들을 어떻게 잘 다스리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대학자 주자의 명성과 달리 그의 세 아들은 학문에 현달하지 못했다. 아버지 또한 아들이 대학자가 될 기질이 일찍이 없음을 알고는 큰꿈꾸지 말고 그저 지방
[용인신문] 양혜왕이 81세 노인의 맹자를 모셔놓고, 자신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음에도 백성들은 그걸 몰라준다며 이렇게 섭섭함을 토로했다. “과인이 백성 다스리기를, 한쪽 고을이 흉년이 들면 그 지역 백성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먹고 살게 했다. 이렇게 열심히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백성들은 자꾸만 다른 나라로 도망하는 통에 인구가 늘지 않는다. 세금은 고사하고……” 여기서 맹자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이야기를 꺼낸다. 쉽게 말해서 그 정도 쯤은 어느 왕이든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나라가 잘되고 백성이 잘사는 나라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양생상사무감養生喪死無憾 왕도지시야王道之始也가 그것이다. 풀어쓰면 이렇다. 산 자는 먹고 사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망자 장례에는 서운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왕으로서 도리에 맞는 정치의 시작이다. 양생養生이란 그날 벌어 그날 사는 일이다. 황정견의 주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먹고 사는데 있어서 불안을 느끼게 되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상사喪死는 죽은 자를 보내드리는 일이다. 조선 예학의 태산북두 사계는 말한다. 장례를 흡족하게 치르지 못하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함이 남는다. 그것이 마음에 두
[용인신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거늘<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말도 달리지 않는구나<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骓不逝>. 말도 달리지 않거늘 난들 어쩌랴<추불서혜가나하骓不逝兮可奈何>.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패해 도망 오는 항우를 향해 말한다. “강동이 비록 적다고는 하나 땅이 사방 천리나 되니 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바라건대, 왕은 급히 건너가소서” 하니 항우가 말한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했거늘 내가 어찌 살아 건널 수 있으랴. 내가 강동의 자제 8000명을 끌고 와 중원中原으로 갔다가 지금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거늘 나 혼자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랴. 듣건대 한나라 유방이 내 목에 천금과 만 호의 읍을 현상금으로 걸었다 하니 내가 너희들에게 덕을 베풀겠다.”하고, 스스로 목을 끊어 죽었다. 사마천 사기 권7 우본기羽本紀에 기록된 말이다. 남자가 일생을 살면서 대망을 꿈꿔볼 기회가 몇 번이나 있으랴마는 그릇이 안 되는 자가 대망을 꿈꿀 때는 여럿이 피곤하다. 역사에는 백척간두에서 건곤일척을 낚겠다며 천하자웅을 기웃하다가 자멸해간 자가 수두룩하다. “군주를 제외한 모
[용인신문] 바름을 해치는 자는 반드시 다른 이를 사악한 자로 몰고, 자신은 바르다고 자처한다. 나아가 동류를 불러 모아서 숨을 모아 산을 날리고 모깃소리를 모아 우레 소리를 낸다. 이 말은 조선말 문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의 인정人政 권2 측인문測人門2에 나오는 말이다. 인정이란 제하의 책은 일종의 정치 평론서다. 정치하는 자가 어떻게 사람을 선별해서 등용할 것인가에 대한 서설을 적어 놓은 글인데 사람에 대한 본질을 꿰뚫는 번득이는 통찰은 상당한 내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몹쓸 것들이 자기만 바르다고 설레발 치는 통에 백성들은 늘 숨이 컥컥 막힌다. 물론 사람에게는 누구를 무론하고 자기 편한대로 자신에게 이득이 있는 쪽으로 행동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지나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중국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 이를 살풍경殺風景이라 했다. 그는 유미파唯美派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되도 못 한 것들이 그야말로 깜도 안되는 그런 것들이 닭 볏만도 못한 벼슬 한자리 꿰찼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에 치를 떨었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시詩들이 대체로 조금은 난해한 면이 적지 않다. 그가 잡찬雜纂이라는 책을 내면
[용인신문] 나라에 망조가 들면 희한한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주나라 유왕幽王 때 일이다. 유왕에겐 포사褒姒라는 절세가인이 있었는데 문제는 이 애비愛妃가 입궁 3년 되도록 웃음이 없다는 것이다. 애가 탄 유왕은 포사의 붉은 입술과 새하얀 이빨인 단순호치丹脣皓齒를 보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궁녀의 실수로 비단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정청각을 울렸다. 이 소리에 포사가 살짝 미소를 띠자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고자 궁 안에 있는 모든 비단을 끌어와 찢어댔고 저자거리에 있는 비단까지 깡그리 끌어다 찢어댔지만 그걸로 끝이다. 포사는 여전히 웃음이 없다. 어느 날 봉화대 병사의 실수로 잘못 봉화가 올라 주변의 제후들이 전쟁이 난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온 일이 있었는데 포사는 정청각루에서 이 모습을 보고는 가슴을 움켜쥐며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을 읽어낸 간신 괵석보虢石父는 유왕에게 봉화 올릴 것을 제의하니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볼 욕심에 장난으로 봉화를 올리도록 명한다. 이 일로 포사가 크게 웃었으니 유왕은 괵석보의 공을 치하하며 그에게 상으로 천금을 내렸다.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천금을 주고 웃음을
[용인신문] 두보杜甫가 사천성 동쪽 기주 골변으로 낙배하여 이듬해 쯤인가 벗의 아들인 소혜가 두보가 있는 곳으로 적소된다. 청운만리의 꿈을 안고 등과했거늘 시대를 잘못 만나 유배를 살자니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에 엄살 좀 작작 떨라며 두보가 군불견간소혜君不見簡蘇徯 제하의 격서 일수를 인편으로 보내는데 장부개관사시정丈夫蓋棺事始定으로 시작되는 후단 초두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쨘하게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봐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남자는 죽기 전까지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라는 말로 “장부일생이란 한번 떠난 사람과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멀어진다.”는 거자일소去者日疏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文選雜詩>. 거자일소로 끝나지 않겠다며 몸부림치며 산 인생이 유향이고, 그가 쓴 책이 전국책인데 중국 동주東周 후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 240년간의 열두 나라 동주東周, 서주西周, 진秦, 제齊, 초楚, 연燕, 조趙, 위魏, 한韓, 송宋, 위衛, 중산中山 나라의 흥망성쇠를 장장 460장으로 정리해서 전국책이라 이름한 것이 그것이다. 훗날 원元나라 오사도吳師道가 전국책교주戰國策校注를 내면서 전국책의 키워드를 두 마디
[용인신문] 기원전 4세기는 현자들의 전성기다. 그야말로 일국의 군주를 상대로 언어가 주는 포장의 기술을 논하는 말의 향연이 꽃피던 시기다. 그들은 왕의 초청을 받아 지혜의 한수로 담론을 폈으며 그런 현자를 군주들은 왕사王師로 대우했다. 양혜왕과 맹자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다. 살아남기 위해선 안할 짓도 못할 짓도 없다던 사내가 양혜왕이었다면 오로지 세 치의 혀 하나만으로 천하를 들었다 놨다하는 사내는 맹자다. 맹자는 공자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거칠 것이 없는 직선<直>의 사내다. 반면에 양혜왕은 일국의 군주답게 나라가 부국강병이 될 수만 있다면 굽은들 무슨 상관이며 꺽어진들 무슨 대수랴 싶은 곡선<枉>의 사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척점對蹠點은 패도정치냐 왕도정치냐에 달렸다. 당시 위나라 양혜왕은 동쪽으로는 제齊나라 손빈 대장군이 이끄는 마릉馬陵전투에 패해 양혜왕측의 대장 방연은 자살하고, 그의 아들 태자신은 사지가 찢겨죽었으며<東敗於齊長子死焉> 서쪽으로 진나라에 700리 河西·上郡지역 15현을 빼앗겼으며<西喪地於秦七百里> 남쪽으로 초나라와의 양릉襄陵전투에서 패해서 8읍을 빼앗기는 모욕을 당했고<南辱於楚>
[용인신문] ‘고은苦恩’이라는 말이 있다. ‘쓴맛의 은혜’라는 말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의 학자 단옥재段玉裁가 허신의 설문해자를 장장 30권 주석을 마치면서 했다는 말인데 함께 설문해자 주석에 참여했던 제자들이 주석의 완결을 뿌듯해하며 우쭐했던 모양이다. 이에 단옥재가 기자불립企者不立 과자불행跨者不行이라는 노자 도덕경 24장의 경구를 말해준다.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바르게 서지 못하며, 가랑이를 벌린 채로 걷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는 것이 자구의 해석이지만 속뜻은 조금 다르다. 기자불립은 자신을 높이려 하는 것에 대한 것이고, 계요 과자불행은 자신을 드러냄에 대한 계다. 이를 송사련宋祀連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불서수숙不恕受孰이라는 말로 압축해 준다. 이 말은 상당히 직설적인데 누군가에게라도 용서받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로,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는 지난한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로서의 뼈아픈 고백이 담겨있는 경계의 잠箴인셈이다. 사련의 삶은 그야말로 질풍노도다. 역사의 공과를 떠나 그에게는 일정량의 스토리가 있는데 경기5악이라는 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을 바라보는 거북바위 위에서 안당정승댁 서고모庶姑母의 아들 노총각 송사련은 낮잠을 자다 청룡과 황룡이 품으로
[용인신문] 안지추가 거친 청춘을 보낸데는 9세 때 부모를 여읜 탓<便丁>도 있으리라. 인성교육에는 가초檟楚가 절대적이다. 공부를 게을리하면 개오동나무<檟>로 만든 회초리를 들어 훈계하고 예의가 없으면 가시나무<楚>로 만든 회초리를 들어 가르친다는 말인데 문제는 부모 없이 자란 형이 동생의 인성교육까지 감당하기란 무리였다. 그럼에도 형은 동생을 위해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논어 학이편 1-4문장 증자의 말. “나는 매일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반성한다”는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등의 문장을 귀동냥해서 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이들 형제들이 살던 시대는 한가로이 경전구절이나 외워도 되는 넉넉한 세상이 아닌 격변의 시대였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하필왈리何必曰利를 묻고 따지던 전국시대의 맹주로 군림하던 위魏나라 대량大梁의 시대가 아득한 세월로 지난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隋나라로 통일되면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야말로 다섯 나라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자가 안지추다. 그가 험한 시대를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를 도와주면 거기에는 반드시 콩고물이 떨어진다는 인정을 터득했던 것이다. 형은 이 부분에서 반대를
[용인신문] 삼손이 헌헌장부의 때 다시 올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에는 델릴라에게 빠져 영안이 흐렸으며 눈을 떴을 땐 낙타 턱뼈로 삼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가 눈을 감았을 땐 신전을 무너뜨려 그 안에 모든 사람을 깡그리 죽였다. 그는 행운아다. 눈이 멀어 괴물이 된 자신을 보지 못했으니까. 삼손을 신전에 묶지 않고 그냥 보내 줬더라면 모두가 살지 않았을까. 어둠을 많이 본 사람은 눈이 먼다<마6:22-23>. 삶이란 가끔이지만 살아온 순간들이 나를 정의할 때도 있다. 이 점이 인간이 종교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종교의 가르침은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서 시작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9:18>’는 예수의 돌연한 물음은 삶의 표층이 아닌 깊이다. 그 중심에 실천으로서의 기독교가 있다.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막12:31>.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며<마5:39>,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이다. 이 숨 막히고도 절대 불가능한 명제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인신문] 기원전 369년 전 일이다. 여러 날을 굶주린 장주가 위나라 문후文侯 감하후監河候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하며 당장 먹을 끼니를 구걸했다. 이에 감하후는 그런 일은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문무백관들과 회의를 거친 후 백성들에게 세금을 공표해서 그때 걷어진 세금으로 300금씩이나 주겠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쯤 되냐고 되물으니 “아마도 올해 안에 이뤄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주 왈, 내가 감하후를 만나러 오는 길에 수레바퀴에 패여 생긴 웅덩이에 물고기가 있었다고 한다. 물이 점점 말라가자 물고기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 “물이 말라 죽어가고 있으니, 물 좀 달라”고 해서 내가 동해에 가서 물을 잔뜩 퍼다가 주겠다 하니 물고기가 절규한다. “나는 당장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합니다.”라고. 여기서 나온 고사가 학철부어涸轍鮒魚이다. 장자 외물 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로부터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나라 안 국민은 중국 우한발 코로나 19로 인해 그야말로 풍비박산 일로에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4인 가족 기준 100만 원씩 긴급재난지원금을 주겠다고 한다. 여기에 맞물려 치러진 게 4월 15일 21대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