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공자와 더불어 유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인류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이 맹자다. 맹자의 말은 특히 군주에게 있어서 벼리가 잘된 날선 검과도 같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군주가 책임져라. 이 말은 맹자가 제나라 선왕에게 한 말이다. 그중 한 내용은 이렇다. “왕의 신하 가운데 그 아내와 자식을 친구에게 맡기고 초나라에 유람하고 돌아왔는데 그 친구가 그 아내와 자식을 굶주리게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 물음은 자칫 이익의 효율성이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수 많은 정치가들이 경제적 이利를 앞세우며 국가 가치를 국민적 이익에 두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정치하며 국민을 위한다는 저들은 다는 아니지만 해당 당사자들의 배만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자 맹자에게 있어서 국가의 가치는 이익 너머에 있는 정의에 둔다. 이익의 효율성은 기업의 덕목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경제 논리를 앞세워 기업 경영하듯 이끌어 간다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헌법이 보장한 법과 원칙이라는 법치를 앞세워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하책에 하수다. 본래 법이란 누군가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는데
[용인신문] 인류 지식의 보고라고 하면 흔히들 고대 그리스를 꼽는데 고대 그리스에는 대현大賢의 반열에 오른 일곱 명의 인물이 있다. 이름하여 칠현자라 부른다. 그들이 쓴 책을 다 합쳐도 첫 줄을 넘어가지 못하는 책이 있는데 곧 공자의 논어 학이편 첫 줄을 말한다. 학이편 첫 줄은 단 세 단어로 압축된다. 배워 즐거웠는가, 그렇다면 군자가 되어라. 유럽의 어느 철인은 공자를 일러 진리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여기서 ‘논어는 성경의 각주다’라는 말이 나왔다. 또 어떤 이는 공자를 일러 천하에 평화를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했다. 독일의 철인 헤겔 같은 사람은 “논어는 단지 도덕적 격언집에 불과하다”라고 한수 아래로 놓고 보기도 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정답이 아닐 뿐, 두보의 시를 읽어보면 “뭐 이정도를 가지고 시성詩聖 운운한단 말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때는 해석본을 함께 읽었을 때 나오는 말이다. 두보의 시를 한문으로 읽고, 한문으로 해석해본 사람이라면 맨정신으로는 못읽는다. “하나님도 두보 앞에 오면 낱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논어서설 끝부분 정자의 말을 인용해 쉽게 말한다면 헤겔은 논어를 제대로 안 읽었던가 아니면
[용인신문] 공자가 송나라에 간 것을 연의하면 이렇다. 공자가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서 큰 나무 아래서 제자들과 함께 “예에” 대하여 공부를 강하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큰 나무를 보면서 하는 말이 저 나무도 사마환퇴가 죽으면 장례에 쓴다고 베어가겠구먼. 이 말을 듣게 된 공자는 제자들이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무덤을 사치해서 만드는 것보다는 죽으면 빨리 썩는 게 낫다. (예기단궁 상편) 이때가 어느 땐가 하니 사마환퇴가 죽으면 쓸려고 석곽을 만드는데 얼마나 거창하게 만드는지 장장 3년을 공사했음에도 끝이 안난 그때이다. 이 말을 소문으로 듣게 된 사마지 위에 있던 환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공자가 강의하는 큰 나무 아래까지 요즘 말로 하면 형사와 검사를 잔뜩 거느리고 가기에 이른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인편으로 듣게 된 제자들은 행여라도 스승 공자께 불미한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사마환퇴가 죽이러 오니 빨리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재촉하는데 논어술이편7-22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공자는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 따위가 나를 어쩌겠느냐?” 그럼에도 공자는 제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복(수수한 차림새)으로 갈아입고 송나라를
[용인신문] 언제부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이 민폐가 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헌법 제13조③항은 이렇게 기록한다.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연좌제 불가조항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개명한 천지에 연좌제를 목숨처럼 끌어안고 사는 곳이 한 군데 있다. 기독교회다. 어느 집안 족보에도 올라와 있지도 않은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이브의 죄가 그것이다. 물론 성서엔 그 남편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스테반 집사가 돌 맞아 죽을 때 현장책임자요 마지막 목격자 사도바울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절의 기록이다. 단일문장으로 인간의 사망에 대해 이보다 더 적절한 문장 만나기 쉽지 않으리.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이다. 유학의 비조 공자 또한 바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인물은 된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서 인류에 메시지를 전한다. 배우고 기뻐했으면 이제는 군자 되어라. 이것이 논어 학이편 첫 문장 32 字가 주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논어 학이
[용인신문] 논어 안연편 12-2장에서 중궁은 스승 공자께 사람의 어진 성품에 관해 물으니 스승 공자는 답한다. 훗날 네가 출사하여 군주가 된다면(집을 나서면) 정치인을(사람을) 만나다면 큰 손님을 뵙듯 공손하며,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큰 제사를 모시듯 섬겨야 한다. 또 중궁 너 자신이 하기 싫은 바를 백성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나랏일 하는 데는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일에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 중궁은 이 말을 다 듣고는 “제가 비록 어리석고 둔하여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전념하여 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기원전 640년 노나라 장문중이 말한다. 내가 하고자 함을 가지고 남을 따른다면 성공할 수 있지만, 남에게 내가 하고자 함을 강요한다면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또 기원전 530년 정나라 재상 자산의 말이다. 백성들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강요한다면 일만 어렵게 할 뿐이지만 백성과 임금이 서로의 하고자 하는 바를 같게 한다면 일에 실패가 없을 것이다. 공자는 일생에 철환주유를 두 번 했고, 위나라를 세 번 갔다. 정나라는 두 번 갔는데 기원전 530년이면 공자 나이 약관의 때다. 아마 이때 정나라 재상 자산을 만나서 들었을 것이라 추정된
[용인신문] 송나라 경공景公은 국방부 장관쯤 되는 지위에 있는 사마환퇴司馬桓魋를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쪽은 죽이고자 한쪽은 살아남고자 그야말로 물밑 생존경쟁이 치열하던 차에 사마환태가 선수를 쳐서 이른바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은 실패하고 사마환퇴는 제나라로 달아난다. 참고로 기억할 것은 당시 장관 지위 이상 쯤 되면 요즘 말로 하면 전관예우라 해서 외국으로 도망? 가면 그 직위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4년 조 기록에 의하면 이 반란에 가담한 형제 친족 모두가 죽임을 당했는데 당시 향리의 목민관으로 있던 사마우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아 목숨에는 지장 없으나 목민관 직위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그야말로 삶은 핍절과 곤두박질로 일색한다. 그런 후 공자 문하에 의탁해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형 사마환퇴가 비운에 횡사했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달받는다. 사마우는 눈물 찬 아픔으로 ‘사람마다 형제가 있거늘 나만 없구나’를 되뇌며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있는데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위로를 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하고 귀한 것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뭐 그깟 일로 형제가 있냐 없느냐를 운운하느냐며 위로인지
[용인신문] 공자에게는 내로라하는 제자들이 많다. 공자의 제자 중에 정치학에서 발군의 재주를 꼽는다면 ‘자로’와 ‘자공’과 ‘자장’이다. 이 중 ‘군계일학’을 꼽으라면 아마도 자장일 것이다. 공자보다 무려 48세나 어린 제자로 공자가 죽기 사흘 전까지 정치가가 되는 요체를 치열하게 묻고 또 물었다. 오로지 ‘정치’가 아닌 ‘정치가’가 되는 방법론에 관심을 두었던 스무 살 조금 넘은 어린 제자다. 자장이 스승께 묻는다. “어떻게 하여야 가히 정치에 종사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의 요지는 간단하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정치가가 될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정치 지망생이라면 이 부분을 작심하고 읽어봐야 할 대목이다. 자장은 공자에 대해서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던 제자 중 하나이다. 예수의 제자를 예로 든다면 사도 도마와 같은 경우다. 도마는 예수 자체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따라는 다니되 선별해서 믿는 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 몹쓸 제자 맞다. 그럼에도 이런 몹쓸 제자가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사건 하나가 있다. 한번은 도마가 물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아마도 예수 자신도 그 말이 훗날 인류 최고의 명문이 될
[용인신문] 인류 어떤 책을 읽어본다 한들 첫장을 넘기자마자 배울 학으로 강제되도록 시작되는 글은 논어가 유일이다. 배울 학學이란 상형자로 풀어쓰면 어린아이가(子) 책상에서(冖) 양손으로(臼) 계산?(爻) 혹은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흔히 한‧중‧일 옥편과 사전 글자를 통털어 17만자라 하는데 이 모든 글자의 앎의 시작은 배울학에서 비롯된다 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올바른 행동은 배우는 행동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 어려서는 감문청학敢問請學이라하여 어른에게 감히 묻기를 청하여야하며, 늙어서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하여 아랫 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goT다. 일찍이 공자의 가장 아둔한 제자로 일컫는 증자는 자신의 배움의 삶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는데 논어 학이편 1-4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핀다. 남을 위하는 일에 충성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귐에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는가.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 모든 결과에는 과정이라는 배움이 담겨져 있다. 그 중심에는 이재명이라는 경기도지사도 포함된다.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사실중 하나가 민선시대 이후 역대 경기도지
[용인신문] 도마가 묻는다.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에 예수는 천고에 길이 남을 답변을 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도마의 우문에 대한 예수의 현답인데 정작 도마는 깨닫지 못한다. 예수 부활 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결과는 그악스러웠고, 도마는 의심의 아이콘으로 낙인 찍힌다. 당시의 도마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지만 그는 생전의 예수를 따르면서 예수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예수의 모든 기적을 보았다. 그런 그였지만 단 하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죽은자가 살아난다는 부활의 신앙이 없었다. 그의 의심의 정도를 사도요한은 그의 고백을 토씨하나 안빼고 그대로 기록한다. 내가 내 눈으로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3년을 동고동락한 스승을 향해서 세상에 이보다 더 지독한 불신이 충만 탱천한 말이 또 있을까(요한복음20:25). 그런 일이 있은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도마와 함께 집 안에 있을 때 문이 닫혔는데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사건이 있다.
[용인신문] 논어 헌문편 14-36장에 혹자의 물음에 대한 공자의 되물음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원한을 은덕으로 갚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공자는 주저함 없이 “그렇다면 덕은 무엇으로 갚으란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쉽게 말해서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이미 덕으로 그 원한을 갚았는데, 문제는 남이 나에게 덕을 베풀었다면 그 베푼 덕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갚겠는가?”라는 말씀이다. 이 말의 출전격인 문장이 노자 도덕경 63장 은시恩始편에 보이는데 덕으로 원수를 갚으라는 말이다. 아마도 공자는 혹자의 물음에 노자의 이 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암튼 공자의 답은 노자의 말에서 확실하게 진일보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답은 이렇다. “원한은 올바름 곧 정직함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이다. 벼슬을 갚아야 할 빚으로 본 것이다. 곧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벼슬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벼슬의 높이가 어떤 위치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성의 기운, 곧 은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은혜를 그 자리에 올라선 자는 갚아야 마땅하다는 것. 서경 우서 요전1-3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백성들을 잘 다스
[용인신문] 정치가 그 나라 백성들과 대화하지 못한다면 둘 중 하나다. 자연사던가 고독사던가 이다. 정치란 백성들의 부음에 대한 응답이다. 정치인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한 삶의 처소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이다. 그랬을 때만이 정치하는 사람에게 정치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는 도깨비방망이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이상가는 ‘묘수가 나와야 한다’라는 것이 정치인의 숙명인 것이다. 정치는 백성들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줄 때 가치는 더욱 빛나는 것이다. 백성들보다 너무 앞서가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뒤처져서는 더욱 안 된다. 정치인은 백성이 갖는 도덕이나 윤리의 잣대보다 더한 바름이 있어야 하고 정치란 누군가를 위함 이 아니라 누구나를 위함이어야 한다. 북송 학자 육상산의 말처럼 사람살이의 질서는 정치에서 나온다. 자로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한다. 먼저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자 자로의 지능으로서는 다소 어려운 답인지라 이해가 안 된 자로는 다시 묻는다. 한 말씀 더 해주시지요. 그러자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하는데 게을리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먼저 수고하는 것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이다. 자로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용인신문]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벼슬이 지식을 먹었다”라고 말한다. 문중자 왕통의 말이다. 그래서 지식인이 벼슬에 나갈 때는 물을 가득 채운 그릇을 들고 가게 한다. 가득 채운 그릇의 물은 여간하지 않고서는 흘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있어서 삼가고 조심하라는 계이다. ‘환공자계’라는 말이 있다. ‘환공이 스스로 경계 삼았다’는 말인데 ‘환공측기’라고도 한다. 노나라 환공은 정사를 보는 자리 오른편에 기울어진 그릇을 두었다. 이 그릇은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바르고 가득 차면 엎어진다는 ‘계영배’다. 이를 순자는 유좌편에서 공자의 입을 빌려 말하길 “가득 차고도 기울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다. 흔히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의 전거가 되는 말이다. 세상살이라는 것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사람 살이는 돌고 돌아 그 무엇하나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게 없다. 주자는 이것을 한 글자로 정리한다. ‘곧을 직直’, “세상 똑바로 살아라”쯤 된다. 주자가 임종 시에 제자들을 불러 했다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세상 똑바로 사는 거 그거 어려운 것도 그렇다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남의 눈에 눈물 내지 않고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