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언덕에서 글 사진 이상엽/작가 사할린섬 남부의 코르사코프시 ‘망향의 언덕’ 앞이다. 오랜 기차 여행 끝에, 비록 바다 건너 섬이지만 이곳은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기에 애써 찾아 왔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쓸쓸하게 잡초만 무성한 언덕일 뿐 그 어떤 표식도 왜 이곳이 ‘망향’이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언덕 아래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일본 홋카이도를 왕래하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정박하는 항구가 보인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이듬해 일본인은 정전협정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됐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유민으로 남은 카레예츠(고려인)들은 코르사코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귀국선을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귀국은 절박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다. 일제가 끝까지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는 당사자 책임론과 신생 대한민국정부의 민족적 책임이라는 두 논리가 충돌했다.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에도 고국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연해주 일대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한 조선의 유민들과 일제
해삼海蔘의 땅 글 사진 이상엽/작가 블라디보스토크는 변방이다. 그래도 장점은 있다. 이곳은 극동의 유럽이라 할 만큼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이 주류이고 서구적인 교양과 합리적인 사고가 흐른다. 게다가 묘하게 아시아적인 규율과 예절이 몸에 배어있다. 도시 주변 환경도 좋다. 특별하게 오염을 일으킬 산업도 존재하지 않고 바다와 내지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시를 구성하는 여러 요건 중에 사람이 살기 좋다는 자연지리적인 장점이 모여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서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라고 자랑하는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옛 이름은 해삼위(海蔘威). 풀어 말하면 해삼이 나는 곳이라는 것인데, 해삼은 바다의 ‘삼’이니 오래전부터 한반도 북부와 연해주 지역의 ‘인삼’을 비유한 것이다. 해삼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구황식품으로 쓰인 것인데, 일본학자 쓰루미 요시유키는 그의 저서 ‘해삼의 눈’에서 한반도 북부 함경도 지역과 연해주의 퉁구스족들이 가장 먼저 해삼을 먹었다고 이야기 한다. 아마도 블라디보스트크의 옛 이름 해삼위는 여기서 연유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한다. 주민은 유럽계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고, 우크라이나인·우데게이족·오로치족·나나이족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 6 하바로프스크 연해주의 한인들 글 사진 이상엽/작가 하바로프스크의 풍경은 넓은 도로와 높지 않은 건물들로 횡 하니 비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지금까지 지나왔던 도시들과 다른 사회주의 냄새가 풍긴다. 직선적이면서 꾸밈이 없는 회색의 빌딩들. 시내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층 아파트의 고려인의 집. 사실 주거등록이 여전히 존재하는 러시아에서 민박집에 묵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요령 것 민박을 하고 주거등록은 호텔에서 돈을 주고 가짜로 만드는 것이 관행이다. 주인집 아주머니의 경상도식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보니 이곳 하바로프스크에는 한국인과 고려인, 북한사람들과 중국의 조선족까지 모여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고려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 시절 강제 이주되고 비어있는 땅에 들어 온 이들은 사할린에서 살던 고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제 전통적으로 연해주 고려인하면 사할린 출신들을 뜻한다. 이들은 한국어를 거의 못할 뿐 더러 문화도 잊었다. 요즘 우수리스크에 한글 간판이 들어서고 한국어가 흘러나오게 된 것은 중국 조선족들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 5 울란우데 잊힌 유산, 부활하는 유산 글 사진 이상엽/작가 부랴티아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의 중심인 소비에트 광장에 서면 거대한 레닌의 두상(頭像)이 보인다. 광장 주변의 소비에트식 건축물들은 마치 사회주의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듯 위용을 자랑한다. 주변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닮았으니 마치 작은 평양이라고 할까? 레닌 두상 옆에서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는 프랑스 청년들은 “야! 여긴 별세계 같아요!”라고 한다. 그 때 바로 옆에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플래카드를 꺼내들더니 데모를 시작했다. 재빨리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데모 사진은 내 전공 아닌가? 데모 사진의 생명은 이슈를 재빨리 파악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 있다. 하지만 요즘은 ‘텍스트’만 전달해서는 재미없다. 인상적인 인물들의 표정과 이슈를 보충 설명할 적절한 배경이 필요하다. 이것을 순식간에 파악해 찍어내는 것이 데모사진의 묘미이다. 데모의 중심에는 칠순이 넘은 노인들이 있었다. 가슴에는 훈장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무슨 데모인가를 물었다. 빅토르 노인이 “우리는 2차 대전 참전용사요. 그 보상으로 작은 아파트를 받았지. 그걸 상속할 수 없다는 거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 4 이르쿠츠크 예니세이를 사랑한 앙가라 글 사진 이상엽/작가 아주 먼 옛날 바이칼리아 신에게는 앙가라라는 딸이 있었다.앙가라는 너무 아름다워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호수 깊숙이 감추어 놓았다.앙가라는 너무 답답했다.어느 날 호수로 날아온 갈매기는 호수 멀리에 예니세이란 영웅이 있는데 그는 모든 여성들의 우상이라 했다.앙가라는 그가 너무 보고 싶어 몰래 호수를 빠져나와 예니세이를 향해 갔다.딸이 몰래 빠져나간 것을 알고 그 길을 막으려 거대한 바위를 던졌지만 허사였다.결국 앙가라는 예니세이를 만났다.앙가라강과 예니세이강이 만난 자연적인 환경이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참으로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르쿠츠크의 메인 도로인 맑스가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 도시는 바이칼에서 유일하게 흘러나오는 유일한 강 앙가라를 끼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바이칼로 수많은 강들이 모여들지만 오직 앙가라만이 바이칼에서 흘러 넘쳐 멀리 예니세이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다음과 같은 설화이다. 강변을 걷다보면 유난히 앙가라만큼이나 매력적인 젊은 러시아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이곳은 시베리아의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어 교육의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3 노보시비르스크 붉은 광장은 붉지 않다 글 사진 이상엽/작가 시베리아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닥터 지바고>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보다 더 유명한 것이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독’ 때문이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학문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아카뎀고로독은 세계 최초로 국가의 계획에 의해 건설된 과학도시다. 1959년 미국을 방문했던 흐루시초프는 미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큰 충격을 받아 아카뎀고로독을 건설했다. 설립한지 몇 해 되지 않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충격을 안겨줬다. 연구소와 학자들의 주거 공간, 문화공간이 어우러진 이곳은 사회주의권의 학문낙원으로 불리며 체제가 다른 나라들에도 과학도시의 원형이 됐다. 우리나라 대덕연구단지도 그 중 하나다. 이제 슬슬 여독이 쌓이는지 처연하고 삭막한 시베리아 풍경을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풍경 낯선 곳에서 잠들면 누가 꼭 옆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장기 여행자라면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는 바로 그런 낯선 곳을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2 모스크바 붉은 광장은 붉지 않다 글 사진 이상엽/작가 모스크바하면 소련 공산당과 붉은 광장이 떠오른다. 모스크바를 구경하면서 붉은 광장을 들르지 않는다면 분명 핵심을 놓치는 것이리라. 크렘린을 통과하니 바닥을 단단한 화강암으로 마감한 거대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어디도 붉은 색은 없다. 그런데 왜 붉은 광장인가? 원래 이름은 ‘크라스나야 광장’으로 고대 슬라브어 ‘크라스나야’는 ‘붉다’란 의미와 ‘아름답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 후 서방세계에는 ‘붉다’라는 의미만이 전달되면서 ‘붉은 광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빨갱이 광장’이니 ‘피의 광장’이니 붙여 버린다면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광장의 원래 의미는 ‘아름다운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그 유명한 바실리 성당이 보이고 크렘린 벽에는 혁명 열사들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들의 이름을 살펴보다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리드의 이름도 발견한다. 그 앞쪽으로 레닌의 묘가 있다. 꽤 정숙해야 할 분위기 인데 영 그렇지가 않다. 그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방금 졸업한 시골 학생들이다. 일테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가는 러시아 기행 1 상트페테르부르크 불면의 백야 글 사진 이상엽/작가 올해는 러시아혁명이 일어 난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며 혁명은 잊혀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변화되는 러시아를 보기위해 멀고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 필자 역시 그 열차를 타고 1만 킬로미터를 달린다. 8회에 걸쳐 그 기록들을 사진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주)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 덧창을 닫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밝은 빛은 계속 나의 잠을 방해한다. 백야 때문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잠깐 어두워졌다가 밝아 버리는 이때를 불면의 계절이라더니, 정말이다. 이곳에 도착한 후로 제대로 잠을 잔 것은 몇 시간이나 될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잠을 청해 보지만 소용없다. 천정에 크고 슬픈 눈을 가진 도머 형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알래스카의 백야 때문에 엿새 동안 잠을 자지 못했던 이 늙은 형사는 총에 맞은 후 중얼 거렸다. “잠이 오는군. 잠 좀 자게 해주겠나?” 영화 <인썸니아>에서 도머 형사(알 파치노 분)가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사실 알래스카의 백야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 때문
이상엽의 사진창작노트 8 사회 사진 사진의 사회적 역할 내가 처음 사진을 찍던 무렵, 90년대 초반은 민주와 독재의 중간 어디쯤 있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사진을 찍던 자들은 ‘사회적 책무’를 회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를 아스팔트를 스튜디오 삼아 작업하던 시기였다. 낮에는 방독면을 챙겨 돌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고 밤이면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며 사진사를 읽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 사진가로 부류된 자들을 제외한다면 아마 사진 역사상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을 꽤했던 이는 루이스 하인(1874∼1940)이었을 것이다. 사회학자였던 루이스 하인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필요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뉴욕 항 앞에 있는 엘리스 섬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초라한 모습에서부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건설하는 위험천만한 노동자들의 모습까지 그의 관심은 도시의 최하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이중에서도 루이스 하인의 대표작은 노동하는 아동들을 찍은 사진이다. 석탄을 캐는 광산에서 실을 뽑는 방직공장에서 그는 셔터를 눌렀다. 당시 뉴욕주민들에게 그것이 일상이었다 해도 그것은 고쳐야할 사회적 문제였고 변화해야할 시대였다.
사진아마추어 포토마추어는 무엇을 할 수 있나 ‘포토마추어’란 프랑스의 사진 사학자 지젤 프로인트가 저술한 <사진과 사회> 15장의 제목으로 사용한 단어이다. 쉽게 생각해봐도 ‘사진아마추어’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그녀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아마추어 사진가에게 할애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많은 예술 중에서도 사진이 굉장히 큰 규모의 아마추어를 형성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사진을 취미로 하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공식적인 통계만으로도 우리나라에 판매된 DSLR(디지털 SLR카메라)이 5백만대 이상이며 사진을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10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인구들이 사진이라는 취미에 엄청난 돈을 퍼붓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하루 동안에 찍어내는 이미지는 수천만장에 달할 것이고 덩달아 그것을 후처리하고 저장할 컴퓨터의 수요도 만만찮을 것이다. 여러모로 사진은 분명 대규모 산업이라 할만하다. 이들은 사진판을 키워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들이야말로 사진을 대하는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 전업이 아니기에 소수만이 모여 탁상공론을 벌이는 전업사진계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문화전반에서
사진책 . . . 책은 사진 찍는데 도움이 되는가? 제목은 우문인 듯하지만, 취미로 사진을 찍거나 직업으로 찍는 이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사진 관련 책을 일부러 찾지 않는다. 천만대의 DSLR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 사진 분야의 책이 여전히 작은 분야로 남아있는 것은 그에 대한 방증일 수도 있다. 이들이 책을 찾지 않는 이유는 몇이 있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예술창작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남의 사진을 자꾸 보는 순간 내 사진이 ‘오염’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별로 볼만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진 수준에 비례해 “그 고민마저 풀어줄 수준 높은 책이 없다”는 것이다. 뭐 그 외에도 이유는 별처럼 많을 것이다.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사진이 등장한지 200년 동안 사실 거의 모든 앵글과 프레임은 다 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모두 달라 보이는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피사체와 사진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배들의 사진을 감상하는 것은 자신의 사진 발전에도 분명 도움이 된다. 최소한 새로운 사진을 보여주려면 선배 사진보다는 나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처럼 내 사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책을 보지 않는
이상엽의 사진 창작 노트 5 필름 카메라 그 아름다움과 불편함의 미학 당신의 로망을 사라 작년, 충무로에 있는 내 다락방 작업실로 중년의 한 남자가 놀러왔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필름 카메라 수리 명장인 김학원 선생이다. 오랜 전 내가 쓴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청어람미디어)로 인연을 맺은 후로 지금껏 카메라 동네인 충무로의 이웃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들른 김선생의 어깨에는 낯선 카메라가 한 대 걸려있었다. 작고 날렵하면서도 육중한 렌즈가 달려있는 처음 보는 카메라. 이 카메라의 이름은 KH1. 전 세계에 한 대뿐이자 가장 작은 6x7cm 포맷의 중형카메라였다. 이 카메라가 세상에 한 대뿐인 것은 김선생이 3년에 걸쳐 홀로 수제작했기 때문이다. 이 완벽한 수동 카메라를 보는 순간 “아! 이건 예술이다”라는 탄식이 나왔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은 “개인이 카메라를 만들 수 있나?” 하시겠지만 사실 전자식 카메라가 나오기 전까지는 라이카나 콘탁스에서 만들어내던 명품 카메라들은 모두 숙련된 장인들이 정교하게 쇠를 깎아 만들 던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개인이 수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보다 혁신적인 카메라로 완성한 것일 뿐이다. 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