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역사에 백성의 삶을 망친 왕이 어찌 한 둘이랴. 그중에 크게 세 명의 악한 왕이 있는데 하나라 걸 왕이 있고, 은나라 주왕이 있고, 주나라 유왕이 있다.
하나라 걸 왕은 술로 연못을 만들고 나무에 고기를 매달아 놀고먹고 마시는 주지육림으로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망친 자요. 은나라 주왕은 주지육림은 물론이려니와 술판장 앞에 기름을 잔뜩 바른 구리 기둥을 길게 늘려 놓고는 그 아래에 불을 지펴 기름 바른 구리 기둥을 벌겋게 달구어 바른말 하는 신하든 백성이든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달궈진 구리 기둥 위를 맨발로 밟고 가게 하니 모두는 몇 발짝 못가서 미끄러지고 떨어져 산 채로 불구덩이에 빠져 타죽는다. 이를 보며 주왕은 술잔을 치켜들고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것이 주왕이 평생에 걸쳐 연구해서 만들어 냈다는 포락지형의 형벌이다.
은나라 주왕은 백성들을 이렇게 다스렸다. 그 결과 왕도 나라도 망했고 백성들의 삶은 곱절로 핍절해 갔다. 끝으로 유왕이 있는데 유왕은 백성들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한 왕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제는 왕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외침이 있을 때 유왕은 백성들에게 봉화를 올리며 호소했으나 백성들은 그조차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 결과 왕은 망했고 백성들을 도시를 떠나야 했다.
왕이 왕의 기본 직무인 백성을 돌아보고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하고 술마시며 향응을 누리며 권력만을 탐한다면 백성들은 그런 왕을 시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반드시 내친다. 이것이 앞선 악왕으로서 비명횡사한 왕들이 가르쳐주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맹자는 이부분을 맹자 이루장구상편9장에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둔바 있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고, 백성을 잃은 것은 백성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서경의 말을 빌어 신하들에게 말한다. 왕이 바르면 백성들은 그를 떠받들지만 왕이 무도하면 백성들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린다. 세상에 이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
고래로 민심의 역린을 건드리고 살아남은 왕은 없는 법이다. 서경 태갑편은 이렇게 기록한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사람이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 탕론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왕은 백성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대저 백성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은 또한 백성이 추대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한다. 그리고 원목편의 경구를 좀더 쉽게 연의해서 풀어쓰면 이렇다.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가?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가?” 라고 의문을 던진 뒤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밝힌다. “왕은 백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는 왕토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다산의 말은 이토록 거침이 없다. 지금은 시대가 왕의 시대가 아니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은 민주를 앞세운 민주공화국이다. 쉽게 말해서 “민이 주인으로 함께 사는 나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민은 국민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을 조금만 더 깊게 들여다 본다면 주인은 집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일정량 책임이 있다는 말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돌볼 우두머리를 뽑아 집안일을 맡겨놨더니 제 분수도 모르고 제 분수의 범위 밖에까지 나대고 다닌다면 주인은 그 우두머리를 어찌해야 옳겠는가.
옛날에 강철군화를 신고 총칼을 들이대며 제 주인을 겁박하고 제가 주인인양 허세부리던 우두머리가 있었다.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법과 원칙을 우습게 여기기를 일용할 양식 먹듯이 했다. 말로는 뜻밖이었다. 혹자는 총 맞아 죽었고 혹자는 감옥과 유배생활을 전전해야 했다. 문제는 이때의 DNA가 아직도 남아서 옳고 그름을 묻고 따지기 전에 이념에 함몰되어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나만 옳다는 뒤틀린 독존의 아집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땅을 편 가르기하고 있다. 주인을 능멸하고 주인을 향해 총을 들이대며 겁박하는 우두머리가 또 나온다면 이런 우두머리를 어찌해야 하는가. 우두머리편에서서 주인을 몰아내야 할까 아니면 우두머리를 내치고 정상으로 되돌려야할까. 여기에 대한 판단은 재판관에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