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45년의 시간차를 두고 찾아 온 기시감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2024년 12‧3 계엄령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계절의 봄은 왔지만, 마음의 봄은 쫓기는 것 같은 을씨년스러움이다. 아스팔트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행진은 멈추지 않고 있다. 2025년 대한민국의 봄은, ‘빼앗긴 봄’과 ‘되찾을 봄’ 으로 ‘심란(心亂)한 봄’이다. 거리와 광장에 나와 외치는 말과 SNS와 커뮤니티에 표현된 글은 분노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분노가 시작된 지점은 억울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핵심은 “누구의 억울함이며, 정당한 억울함인가?”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분노의 지점은 무엇인가?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다.”는 지적에 공감백배를 저울질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일반적으로 분노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행하는 분노 이외의 모든 분노의 표출은 ‘성숙한 사회’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권력자의 분노는 공동체의 질서유지를 위한 수단이고, 약자의 분노는 질서 파괴의 행위로 규정하여 처벌하는 것이 모순인 이유다. 권력자의 탐욕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위한 분노의 폭발은 민주주의 역사의 과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보복의 상징처럼 쓰이지만,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공감의 언어다. 구약성서 레위기에 쓰인 “사람이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상대에게 행할 것이니, 뼈를 부러뜨렸으면 상대의 뼈도 부러뜨려라.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 어라”는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과응보의 적절성과 공정성을 원칙으로 복수의 한계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 즉 받은 대로 돌려주되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이다. 분노의 폭력적 처벌이 아니라 정의 실현을 위한 소박한 응징(?)의 문장이다.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존재한 감정의 끈이 풀린 사회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폭력의 시작은 혐오에서 출발한다. 혐오의 숙주는 자기 몸, 내부의 관념에서 나온다. 파시즘이 그 정점이다. 파시스트는 피아, 자아의 경계가 없다.
내가 곧 세상이다. 공포와 무지로 작동하는 혐오는 자기도취와 집단적 일체감에 의해 타인을 짓밟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직진한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특정 종교의 이름을 걸고 아스팔트에 모인 사람들이 알만한 문장,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누가복음 23장 34절의 구절에 관해 묻고 싶다. ‘저들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성찰을 제시한 위대한 문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고, 가장 악랄한 모습은 자신을 모를 때 나타난다. 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고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자기 행동에 대한 사유는 한없이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다짐과 새김질의 문장이다. 웬만한 죄의 원인은 ‘앎과 모름’으로 나누지만, 내란으로 국가를 망치게 한 자들에게는 ‘앎과 모름’의 문제가 아니다. ‘가해와 피해’가 기준이다. 죄는 사회적 판단이지 개인의 무지 여부와 상관없다. 무엇보다 ‘저들’은 자신이 한 일을 안다. 목적이 분명한 확신범들이다.
저들이 행한 가해의 기준에 대한 법적 판단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다. 2025년의 ‘빼앗긴 봄과 되찾은 봄’ 사이에서의 기준은 공동체의 정상화를 방해한 ‘저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연루된 자들에게 교정(矯正)은 필요 없다. ※사족, 사악한 소수가 다수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사회, 없게 하는 사회가 ‘되찾을 봄’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