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사람들 삶의 마지막을 같이 하며

  • 등록 2006.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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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보할아버지 고(故) 고성덕(高成德.1923~1999)
상가집의 익살꾼…용인의 추억 가장 잘 대변

   
 
삶의 뿌리를 찾아서

글.배한진 조선일보 기자

인물 탐방 기사를 준비하면서 몇 개의 원칙을 세웠다.
그 첫 번째는 생존 여부 떠나 사람들의 기억에 큰 인상을 남긴 인물. 두 번째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과 접촉이 있었던 인물. 세 번째는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인물 등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기준을 세워 놓고도 첫 번째 탐방 대상 인물을 선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첫 번째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조상 대대로 용인 토박이인 필자로서는 자칫 공감대를 얻지 못할 인물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았다간 비난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모임이 있을 때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격의 없는 조사’를 벌여 봤다. 이런 원고를 쓰게 됐는데, 누구를 첫 번째 대상으로 했으면 좋겠느냐는 자문을 구한 것이었다. 질문에 응해주신 분들은 50명 정도. 연령은 30~50대가 주를 이뤘고, 대부분 용인에서 오래 살아온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얻어진 답이 ‘곰보할아버지 故 고성덕(高成德.1923~1999)옹’이었다. 특정 학연이나 지연에 관계 없이 용인 토박이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인물. 개인적으로도 그 분의 이야기를 활자로 남긴다는 건 무척이나 영광스런 일이다.

상(喪)이 나면 나타나는
곰보할아버지
1979년 10월 어느 날. 가족과 친척들이 집으로 모여들었고 초등학생이던 난, 쪽방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며 어른들의 눈치를 살폈다.
안방으로는 어른들이 분주히 들락거렸는데, 할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가 간간히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날밤 그렇게 할아버지는 떠나셨다.
새벽녘부터 옆집 대장간 할아버지가 오셔서 곡(哭)을 하셨고, 또 다른 많은 분들이 집으로 오셨다. 그리곤 그분이 오셨다. ‘곰보 할아버지’. 시장 골목 어귀 우리 집 앞에서 자주 뵈었던 그분.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우리 할머니가 “고씨 어디가우”라고 불러 세우면, 그 때마다 멈춰서 익살을 늘어놓던 재미있는 할아버지였다.

그 때까지도 난 곰보 할아버지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알지 못했다.
시장 동네선 큰 상(喪)이었다. 3일 내내 마당에 가마솥이 걸렸고, 어린 눈으론 헤아리기 힘든 손님들이 밤낮을 들썩였다.

그런 와중에 내내 빠지지 않고 곰보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계셨다. 식구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할아버지는 마당에 나가 노래도 했고 욕지거리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곰보 할아버지를 보고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했다.

이젠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엉엉 울던 나도, 잠깐잠깐 눈을 돌려 그런 곰보 할아버지의 익살을 봤다. 그리곤 재미가 있어 ‘씨익’웃음을 짓기도 했다.
3일째 할아버지를 태운 꽃상여는 우리 집을 떠나 경찰서 앞, 사거리를 지나 선산으로 갔다. 그 꽃가마엔 곰보할아버지가 타고 있었고, 작은 종(요령)을 흔들며 무어라 외치시면 가마를 멘 장정들이 이를 받아 ‘어와어와’라고 외쳤다.

할아버지를 묻으며, 곰보할아버지는 북을 치고 노래를 하셨다.
그리곤 얼마 뒤 앞집 방앗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또 그곳엔 역시 곰보 할아버지가 오셨다.

‘아 곰보 할아버지는 누가 죽으면 오시는구나.’
그리고 또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난 TV에 곰보할아버지가 나오지 않는 것이 내내 궁금했었다.

용인에서 자란 30대 중후반이라면 곰보 할아버지에 대해 대충 이런 정도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엔 나도 그분의 함자(銜字)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용인 사람들에겐 삶과 죽음, 슬픔과 기쁨을 연결해주고, 악상(惡喪) 호상(好喪)을 가리지 않고 궂은일을 도맡아 해오던 분이었는데 말이다.

누구도 흉내못낼 손재주
곰보 할아버지 고성덕 옹은 1923년생 수원 출생이다. 원래는 형제가 10남매였으나 중간중간 명을 달리하면서 4형제만 남았다고 한다.

어릴적 큰 아버지가 수원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셨는데, 학교 공부보다 기술배우기를 좋아했던 고 옹은 초등학교 졸업 후 이곳에 취직해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뭐든 한번만 보면 척척 익히는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하니, 차가 드물던 당시로서는 명예와 돈을 한번에 가질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고 옹의 자동차 기술이 무르익을 20대 초반 무렵, 큰 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공장이 망하면서 고 옹의 가세도 함께 기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모와 형제, 사촌들까지 데리고 무작정 용인으로 이사를 온 것이 1945년. 선친(先親)은 용인으로 오자마자 돌아가셨으니, 노모를 비롯한 온 가족의 생계는 고 옹의 책임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재주는 용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고 옹은 차량이 고장났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출장정비업을 시작했다.

용인에 몇 대 안되던 GMC트럭을 비롯해, 당시 군청과 경찰서 등 관공서의 차량들까지도 고 옹이 없다면 굴러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재주를 짐작 할만 하다.

장남 인관(55)씨는 “아버님은 젊은 시절 자존심 있는 엔지니어라고 전해 들었다. 기술이 워낙 뛰어나 6.25때는 인민군들에게 끌려 전라도까지 갔다가 도망을 오기고 했고, 중공군이 들어 왔을 때는 강원도까지 끌고 갔다가 “전쟁이 끝났으니 돌아가라”며 풀어줘 용인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고 어린 시절 들은 얘기를 회고했다.
그러기를 20여년. 중년에 접어든 고 옹은 1966년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해, 경남여객 정비 파트에 입사했다.

엔지니어 시절에도 그는 어디든 노는 자리가 있으면 결코 남에게 뒤지 않는 노래실력을 자랑했다. 남들보다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휴대용 축음기를 항상 옆에 끼고 다니며, 최신 가요들을 섭렵(涉獵)했고, 원판 못지 않은 목청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가창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타고난 입담과 질펀한 욕설은 어딜 가도 사람들이 그를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기가 찾아 왔다. 경남여객에 입사한 지 4~5년 됐을 무렵. 고 옹은 직장을 그만 뒀다.
“차종도 자꾸 바뀌고, 눈도 침침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곤 동네 상가에 다니며 재미삼아 ‘선소리’를 하다가, 노인들이 주관하던 염습(殮襲)절차며 장례예법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게 됐고 차츰차츰 이것들이 손에 익자 아예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복잡한 자동차 기술도 어릴 적 어깨너머로 보고 익혀 숙련공까지 이른 그였다.
누구에게 체계적인 장례절차를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고 옹은 동네 노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복잡하고도 궂은 그 일들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게다가 그에겐 좌중을 휘어잡는 재치와 목청까지 있었다.

상가(喪家)에는 슬픔이 상존하기 마련이지만, 슬픔에만 빠져 있다보면 격식 갖춘 절차를 치르기가 어려운 법. 시신 앞에선 엄숙하다가도, 재치를 부려 문상객들과 상주들을 집중시키고, 일꾼들에겐 힘을 주는 것이 고 옹만의 독특한 장례집행 절차였다.

타고난 소리꾼…용인의 인간문화재
이인영 전 용인문화원장은 “고 옹의 선소리나 장례절차는 체계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목청이 유별나게 구성지고 좋아 그 방면에서서는 인간문화재급”이라며 “용인에서 그 방면에 그렇게 소양 있는 사람은 그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의 평처럼 그는 타고난 소리꾼이자 의례가였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도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 옹은 1996년 전립선암 판정을 받고도 운명하기 1년 전인 1998년 여름까지도 궂은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2남2녀를 키우며 혼인 날짜를 받아 놓고도 상가에 나가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이끌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금기시 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런 것 저런 것 따지면 궂은 일 못 한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고 한다.

소리꾼으로 자신의 레퍼토리를 개발하기 위한 그의 노력도 보통이 아니어서 암판정을 받고도 최신곡이라면 무조건 배워 익히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

1999년 고 옹의 장례식에서 선소리를 했던 용인의 후배 재주꾼 정해웅씨의 회고는 고 옹의 열정과 숭고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린 노래하는 사람으로 산에 가서 선소리나 하지만 그분은 염습까지 도맡아 하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재치가 넘치고 밝으셨는데, 이는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생전에 상가뿐만 아니라 잔칫집에도 잘 다니셨는데, 그 때마다 난 그분을 ‘용인의 인간문화재1호’라고 소개하고 무대로 모셨다. 이미자, 주현미 할 것 없이 레퍼토리도 무궁무진했고 제스처도 노래에 따라 참으로 다양하셨다. 지금도 ‘얘~ 주현미 짝사랑으로 돌려라’고 하시던 음성이 생생하다. 그리곤 상가에 가셔서는 구성진 회심곡과 선소리로 유족들에게 슬픔과 뉘우침을 느끼게 하셨으니… 그분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시고 웃음을 주신 분이다. 그 어른 마지막 길을 선소리로 모시며,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용인의 인간문화재 1호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이제는 떠나고 없는 용인 인간문화재1호. 어디 그에 대한 회고를 늘어 놓자면, 몇날며칠이 걸릴 분들이 용인에서 한 둘이겠는가.

그러나 고 옹을 평생 보아 왔고 가까이서 모신 장남 인관씨의 심정은, 지금은 없는 그분에 대한 용인사람들의 추억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리라.

“집에서는 자식들에게 엄하신 분이었는데, 상가에 가시기만 하면 남들에게 짙은 농을 하고 욕설을 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싫었다. 아버지 노래를 듣고 남들이 웃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난 아버지가 가시는 데는 안갔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우리 아버지가 가시면 장지엘 가지 않았다. 1994년도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부쩍 더 늙으셨는데, 그런데도 일을 계속하셨다. 당신이 좋다고 하신거지만, 자식으로선 안타까울 수 밖에… 하지만 아버지 장례식에 여러분이 다녀가셨는데 그분들이 한결같이 ‘세상을 참 보람되게 살고 가셨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도 깨달았다. 아버진 참 잘 사시고 가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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