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유일의 토성사족(土姓士族) 용인이씨(龍仁李氏)

  • 등록 2006.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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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名家를 찾아

   
 
글.홍순석(강남대교수, 용인향토문화연구원회장)

한 지역의 문화는 지형적 여건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인물군(人物群)에 의해 형성된다. 어느 한 지역에 누군가가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토지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후손이 증가하고,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동족촌(同族村)이 형성된다. 그리고 가문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인근지역으로의 확산과 분화가 이루어진다. 용인지역은 비교적 다양한 성씨가 중소규모의 동족촌을 형성하면서 나름대로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용인의 명가를 통해 용인지역의 문화를 조명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용인지역의 토성사족(土姓士族)으로 명맥을 계승해온 가문은 용인이씨(龍仁李氏)뿐이다. 추계추씨(秋溪秋氏)도 용인에 본관을 둔 성씨이지만 실재하지 않는다. 용인이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면서 중앙으로 진출하였고, 이를 토대로 용인지역에서 명문거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용인이씨의 시조 이길권(李吉卷)에 대해서 정사(正史)에 전하는 기록은 없다. 용인이씨 세보(世譜)에 전할 뿐이다. 세보에 의하면 그는 신라 효공왕 8년(904)에 용인에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남달리 학식과 재능이 뛰어났다. 특히 천문지리에 밝았다. 도선대사(道詵大師)와도 교분을 나누며 경륜을 닦았다고 한다. 훗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큰 도움을 주어 개국공신의 예에 따라 대우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뒤에 왕건은 그의 인품을 추앙하여 구성백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숭록대부 태사(駒城伯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崇祿大夫 太師)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또한 왕건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고려조의 첫 부마(附馬)가 되었다.

평소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고 청렴하게 살았던 그는 용인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내다가 목종 18년(1008)에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안곡공(安穀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손들도 그의 숭고한 뜻을 흠모하여 시조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용인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사영(李士潁)이 수지구 풍덕천동에 자리잡은 이후 현재까지 500여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모현면 왕산리, 포곡읍 신원리와 유운리 일대에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권10, 경기 용인현의 인물편을 보면 대부분이 용인이씨이다.

“<본조> 이사위(李士渭):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개성유후에 이르렀다. 이백지(李伯持) 사위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길보(李吉補) 백지의 증손으로 두 차례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경기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우보(祐補)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직제학에 이르렀다.”

용인 이씨는 고려조 이후 대대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용인을 빛낸 대표적인 가문이다. 고려조의 이효공(李孝恭)은 정종 때 문화시랑을, 이현후(李鉉候)는 인조 때 평장사를, 이광시(李光時)는 충숙왕 때 판도판서를 지냈다. 이중인(李中仁)은 고려말 8현(八賢) 가운데 한 명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특히 두문동 72현과 함께 절의를 지킨 학자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아들 이사영(李士穎), 손자 이승충(李升忠)과 삼대에 걸쳐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벼슬한 이는 이사위(李士渭)로 개성유후를 지냈다. 이백지(李伯持)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 뒤로 부자가 정승을 지낸 이세백(李世白), 이의현(李宜顯)과 같은 인물이 있으며, 세 명의 재상과 네 명의 판서를 한 집안에서 배출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이숭우(李崇祐) 이재학(李在學) 이규현(李奎鉉) 이참현(李參鉉) 이원명(李源命) 이돈상(李敦相)이 모두 판서를 지내 ‘육판서집’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중종 때 성리학자인 이담(李湛), 선조 때 명장인 이일(李鎰), 그리고 철종 때의 화가 이재관(李在寬) 등이 모두 용인이씨의 후예들이다.

용인 이씨의 발상지(發祥地)
잔다리 마을
용인이씨가 처음 용인에 자리 잡았던 곳은 지금의 기흥구 영덕동 잔다리 마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조 이길권의 작호(爵號)가 ‘산성군(山城君)’ 또는 ‘구성백(駒城伯)’으로 칭하여졌다는 점이 그 같은 개연성을 시사한다. 9세인 이인택(李仁澤)의 처가 ‘은성택주 용구진씨(殷城宅主 龍駒秦氏)’라는 사실도 방증 자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에 용인현의 대표적인 성씨로 진씨(秦氏)가 수록되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권10, 경기 용인현의 성씨편에 본현(용인현)의 성씨로 ‘秦·李·宋·龍·嚴’씨가 소개되어 있다.

이인택의 처가 바로 용구진씨(龍駒秦氏)이다. 용인이씨와 용구진씨가 혼척을 맺었다는 사실은 두 가문이 모두 당대 용인지역의 호족이었음을 시사한다.

용인이씨의 세장지인 기흥구 영덕동을 속칭 ‘잔다리’라고 한다. 이는 ‘자은교(慈恩橋)’를 우리말로 부른 명칭이다. 잔다리라는 지명도 이인택과 연관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인종 무렵 이인택은 무려 아홉 군의 군수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의 선정은 온 고을의 백성을 감동케 하여 널리 칭송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잔다리 마을에 살았을 때 인근의 백성들은 그를 위하여 집 앞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가 완성되자 모두들 그의 인자한 성품이 자상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따뜻하였다고 해서 ‘자은교’라고 불렀다. 그후 ‘자은 다리’로 불려지다 언제부터인가 ‘잔다리’로 변하여 전한다.

용인이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잔다리 마을에는 ‘구성재(駒城齋)’가 있어 용인이씨 문중의 회합이나 시제 때 사용하고 있다. 추원사(追遠祠) 사당 안에는 시조 안곡공을 비롯해 14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4일에 제향하고 있다.

잔다리는 삼국시대 백제에 속한 용인지방 호족의 거점이요, 고려조와 조선조에는 집성촌을 이루어 용인을 빛낸 명소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잔다리 마을에서도 용인의 대표적 가문인 용인이씨를 만날 수 없다. 거의 모두가 타지로 거처를 옮겼으며, 최근에는 영덕아파트 단지를 조성중이다.

현재 잔다리 마을에는 용인이씨발상지비, 이중인의 묘역과 신도비, 구성재가 있어 용인이씨의 발상지임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잔다리’의 터라도 찾을 욕심으로 20년을 조사해 보았지만 성과가 없다. 이젠 잔다리 마을의 전설을 이야기해주는 이도 없다. 새로 조성될 영덕지구 아파트단지 입구에 ‘잔다리 마을 유래비’라도 세워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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