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선비 마중 나올 듯

  • 등록 2006.1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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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문화 나들이-양지향교

   
 
글·정기숙(문화해설사)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으뜸이다. 이는 부족한 지하자원, 좁은 국토라는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런 교육열은 인재양성으로 이어져 국가발전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인재를 양성하던 향교.
용인시에는 현재 1523년에 건립된 양지향교와 1400년에 건립된 용인향교 두 곳이 있다. 가을이 무르익는 계절. 양지의 옛 선비들이 공부하던 양지향교로 발길을 옮겨보자.

# 향교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학교 교육의 시초는 고구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 처음으로 유교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이 건립되고 교과로는 오경(五經)과 삼사(三史)가 채택되었다. 태학이 중앙에 세워지고 귀족자녀를 대상으로 교육을 시켰다면 경당은 평민층 자제와 지방 호족의 미혼 자제를 교육 시켰다. 교육내용은 경전과 궁술이었다.

시대의 변화는 중앙과 지방의 교육기관의 필요성으로 나타나고 고려시대 학교 제도로서 향교가 발생한다. 고려시대의 향교는 성종 대를 거쳐 인종 대에 와서는 문묘의 제를 갖춘 학교로서 지방의 군현에 하나씩 설치된다. 고려시대의 향교는 공자의 선성을 모시는 제사기능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능으로서의 명륜당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기관인 동시에 제사의 기관이다.

조선왕조 창업의 중심인물이 성균관에서 교육받은 신진사대부였고 그들의 정신적 기반은 유학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교서를 발표하면서 중앙의 국학과 지방의 향교를 장려했다.

태종은 향교진흥책으로 유수관과 부목관이 있는 향교는 종례 15결의 향교전을 30결로 연령과 감무가 있는 고을의 향교도 차등을 두어 향교전을 늘렸다. 전국의 고을마다 향교를 설치하면서 세종대까지도 절을 빌려 사용하기도 하였다.

15세기 경국대전이 반포되어 향교의 규례가 확정된 뒤에는 군현단위로 향교가 성립되고, 단독의 건물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의 행정 단위마다 향교가 설치되어 모두 360여개로 증가되고 명실상부한 지방교육 기관이 되었다.

# 경기도문화재 23호 양지향교
양지향교는 용인시 양지면 양지리 교동 379번지에 있다. 1973년 9월 17일 경기도 문화제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중종18년(1523년)에 초창되었다고 한다. 그간에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1981년에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실시하였다.

보수 작업 중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내삼문(內三門)을 해체해서 복원하는 도중 조선 숙종26년(1697)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망와 1개와 수막 1개가 발견되었다. 망와와 수막새기와에는 기와공 한순일(韓順日)과 강태운(姜太云)등의 이름이 음각되었고, 화원(火員:불때는 장인) 김상조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300년 전의 일이다.

명륜당이 해체되었을 때는 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건륭(建隆) 임자년(壬子年;1792) 3월 28일 묘시(卯時)에 상량한다.”라는 기록과 당시에 공사에 관여했던 현감(縣監)과 좌수(座首)등 11명의 명단이 있었다. 이때 명륜당이 중건된 것이다. 그 후 “소화(昭和)3년 무진(戊辰:1928) 2월 25일 미시(未時)에 상량하고 중선(重繕)한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일제 때도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세 차례의 중건을 거쳐 전해지는 것이다. 향교건물의 배치는 평지인가 또는 비탈인가에 따라서 배치형태가 달라진다.

평지의 경우는 배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뒤에 강학공간을 두었다(前廟後學). 비탈인 경우는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배향공간을 뒤에 두었다(前學後廟). 둘 사이에 특별한 의미는 없고 대성전(배향공간)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지형에 따른 구분이다. 양지향교의 경우는 홍살문~외삼문~명륜당~내삼문~ 대성전으로 배치되어 있다.(前學後廟)

# 신성지역을 알리는 홍살문
홍살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외삼문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나무문으로 선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나 왕릉 등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시물이다.

# 가운데가 신문(神門)인 외삼문
외삼문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에 따르고 가운데 문은 신문으로 혼이 드나드는 문이다. 형식은 솟을삼문(가운데 문의 지붕이 더 높은 것)이다.

# 은행나무가 있는 명륜당(明倫堂)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명륜당은 일반적으로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형태인데 이곳이 교육장소인 동시에 교관의 거처로 쓰였기 때문이다.

학생은 양반과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생도의 정원은 50명에서 최하 15명이며 교수관의 보수에 대한 규정을 두었다. 학생은 군역을 면제 받는 특권이 주어졌다. 양지향교의 명륜당은 1967년에 서까래 일부를 교체 하였고 1971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이던 것을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복원했다.

면적은 12.58평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되어 있다. 양지향교는 명륜당 옆쪽에 학생들의 기숙시설인 동재와 서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명륜당 마당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공자가 그늘나무 한 가운데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향교 마당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다.

# 제기고로 사용하는 내삼문
솟을삼문의 형식으로 양 옆에 방을 만들어 제기고로 사용하고 있다.

# 팔각기둥으로 된 대성전(大成殿)
내삼문을 지나 제향공간인 대성전 앞마당에 들어서면 아늑함과 더불어 숙연함이 느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 면적은 19.66평이다. 창호는 띠살 분합문으로 안정되고 아름다운 외관을 갖추었다. 특이할 만 한 점은 전면기둥이 팔각의 형태라는 것이다.

대성전은 유학의 상징인 공자를 모시는 공간이다. 양지향교의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4성 4철 18현의 신위를 모셨다. 2006년에는 공자탄신 2557주년이 되는 해로 10월 18일(음력8월 27일) 공자탄강일을 기념했다.

용인지역의 4개면(양지면 이동면 원삼면 백암면)에서 100여명의 유림회 회원과 용동중학교 학생들이 참여해 행사를 성대히 진행했다. 2006년 현재 630여명의 회원(여성유림회원 20명, 2005년부터 회원가입)이 등록되어 있다.

유림회 회원과 학생들이 나란히 서서 행사를 하는 모습에서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다시 미래로 연결되는 전통문화의 큰 물결을 보는듯 해 매우 흐뭇했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던 향교는 조선중기 이후 교육기능보다는 재향의례에 더 초점을 두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기능마저도 없애버리려 한다. 유교의 맥을 이어오던 향교의 전통마저도 일제에게 탄압받게 된 것이다. 총독부에 의해 설립되고 허가된 학교를 세워 유교 교육을 배제하고 민족 전통의 단절을 도모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유교교육은 전통문화로 새롭게 인식되고 재탄생되었다.

오늘날 양지향교는 학생들에게 충효교육을 시키고, 부설명륜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연결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려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전통사상의 현대적 재해석과 창조속에서 전통문화는 더욱 더 아름답게 꽃 피울 것이다.
김미숙 기자 kiss1204h@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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