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여인, 여성, 그리고 아내

  • 등록 2006.1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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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 교수의 新철학에세이 / ‘한국인 의식의 새로 읽기’

   
 
글 한호/시인·평론가 stevenshano@hanmail.net

우리는 언어의 색깔을 잊고 산다. 입속에 닿는 아이스크림 맛은 31가지나 분류하면서도, 정작 내 옆에 같이 사는 여인의 향기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할 때 나의 언어로 다가온다. 모든 외부 존재가 나의 언어를 통해 존재성을 갖듯이, 내 주변의 실제 인물도 나의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존재로 인정된다. 오늘은 우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에 대한 언어적 분류를 통해, 그 이름의 오묘한 맛의 차이를 느껴본다. 모든 꽃은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불러줄 때, 나의 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원화된다. 신은 오직 두 손으로 두 성(性)만을 창조하였다. 신의 손이 여러 개였다면, 인간의 성도 좀 더 다양하게 분류되지 않았을까? 다행이도 신의 손이 두 개였기 때문에, 개를 또 다른 성으로 만들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상대 존재에 대해, 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듯하다. 특히 남성은 여성에 대해 뒤늦은 감성적 반응을 나타낸다. 그 반응을 여성에 대한 수식어에서 살펴보자. 남성은 대개 자신의 이성에 대해서 여자, 여성, 여인, 아내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

“여자”라고 뇌깔이면, 무언가 육체적 내음이 느껴진다. 성적인 모티프를 포함한 육체적 관계를 암시한다. 군 입대하기 전에 들리던 미아리와 청계천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여자라는 어휘 속에는 여인이 낳은 새끼(女子)라는 낮은 느낌이 든다. 승화된 정신적 맺음, 지적 관계가 아니라, 육체적 소비를 전제하는 만남을 느끼게 해준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에서 큰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과 관능, 눈길, 긴장, 목심을 느끼게 한다. 안정된 민가슴의 연민과 그윽한 슬픈 눈길이 아니라, 순간의 자극과 쾌락을 끄는 빠른 눈길을 강요한다. 홀로 있을 때, 가운데 근육이 팽배하며 회포 풀고 싶은 욕망이 강할 때, 옆에서 있어주기를 바라는 아름다운 육체의 여자를 그려주는 듯하다.

“여성”하면, 객관적 이성적 관계를 연상시킨다. “여자”처럼 낮춤이 아니라, 높임과 격식을 준다. 직장에서나 공적 관계에서 상대에게 일정한 질서와 여유를 주는 사회적 관계를 보게 해준다.

예의와 질서적인 어투로 다가서는 여선생과 동료의 관계로서 횡적 질서를 내정 받는다. 일정하게 소주잔을 같이 기울이고, 축하 하며 헤어져도 이차 술자리에 대한 기대감이나 떠나는 손을 붙잡고 싶은 욕망이 없다. 그냥 만나며 일정한 사회적, 지적 관계와 공적 얘기만 설정된다. 육체적 눈으로 보이지 않고, 사무적 업무의 발화자로만 보인다. 여자로서의 자극은 일어나지 않고, 경쟁과 비교로서만 견주는 대상이다.

이러한 객관성과 탈 성적 느낌 때문에 “여성”은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선호하는 말이 되는 듯하다. 아름다움과 미침, 빠짐, 몰입 등의 열정적 감성보다는 냉철함, 차가움, 균형, 불임 등의 싸늘한 감각만 다가온다. 탁구공의 새하얀 청결함이 눈앞에 오가며 현란한 대중병원의 간호사 흰 모자가 연상된다. 비로드 앞섶이 살풋이 열릴 때, 넌지시 굽어보는 눈길보다는 유니폼의 정결한 질서에 거수경례를 하는 관계가 엿보인다. 여자적 미학보다는 여성적 논리학이 더욱 익숙한 표정으로 드러난다. 언어조심을 해야 할 듯하고, 잘못 바른 루즈 선이나 아이쉐도우 선을 보고도 침묵을 지켜야 하는 몸살이 돋는다.

“여인”하면, 원숙한 나이에 접어든 이상적 여성을 대하는 느낌이다. 일정한 거리와 품위, 안정과 평온, 편안함, 서로 기대일 듯한 안정감이 전제된다.

무언가 지적인 토론과 문학적 담론을 주고받을 수 있는 듯한 만남, 카페에서 시를 읊조리며 같이 웃을 수 있는 듯한 여인, 지긋한 미소에 공연히 끌리는 듯한 미소가 있다. 하얀 머리에 지적인 풍모가 괜스레 편안해서 좋다.

어느 선술집에서 둘이서 기울이는 막걸리가 더욱 긴 겨울을 나는 인간적 만남으로 따뜻하게 전해온다. 가까이 있기보다는 어느 순간인가 찾아가 보고픈 먼 거리의 정인(情人)처럼 느껴진다. 그림 속에 가두어 놓고 싶은 시간 속의 여인이다. 여자적인 육감이 없고, 여성적 딱딱함이 없는 아주 그리운 관계의 이성이다.

여인은 여인으로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다. 여자로서의 질투와 여성으로서의 독점욕과 전투성을 넘어서는 사랑과 용서의 눈물을 보게 된다. 비오는 날 괜스레 동성 간에도 그리워지고, 이성간에도 그리움을 잡아당기는 존재다. 유월의 어름 같지 않고, 동짓달의 장미 같이 원숙하게 일어난다.

바람 속에 움직이지 않는 희망 같이, 꺼풀이 날라간 옥수수 알처럼 정결하게 가라앉는 여인이다. 그녀는 묘비명처럼 차가운 듯하지만, 은은히 회상하는 아픔을 주고, 거짓인 듯 감추지만 신임할 수 있는 진실된 숨김이 있다. 낯 선 휴양지에서 목욕하고 난 신선한 기대감처럼 설레이면서도, 피톤치크 솟는 아침 산보길에서 손만 잡고 걷는 푸근함이 있다.

“아내”하면, 여자와 여성과 여인이 같이 어우러지는 인간상을 본다. 가장 편하면서도, 가장 격식을 갖춰야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자로서 젖가슴을 안고 싶은 여인이다. 원숙한 깊이와 기대이일 수 있는 편안함, 그리고 동시에 침대로 항상 끌어들이는 매력을 요구하는 관계다. 일상적이면서도 사무적이고, 그리고 신비로운 면이 동시에 공존하기를 바라는 여인이다.

밥짓기 하는 일상성과 고지서 계산하는 사무성과 사랑의 깊이를 환기시켜주는 신비성이 어우러지는 여인이다. 모두가 감사와 기쁨으로 은근히 사랑하고픈 생의 뒤안길 반려자 기질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에는 여자로서 아내를 보고, 삼십대는 여성으로서 동등한 관계에서 동료적인 티걱거림과 서열다툼이 존재한다. 사십대 넘어서면서 아내를 여인으로서 대하기 시작하고, 50대에 들면 진정한 아내로서 그 복합적 기능성에 의존하게 된다.

아내는 여자에게 매달리듯 항상 칭찬하며 매달리는 가까이함이 없어도 되고, 여성처럼 사무적 격식을 나누지 않아도 되고, 여인처럼 멀리서 가까이 존경하며 서로 의연하도록 노력하는 절제감이 없어도 좋다. 아내는 내친 김에 응석도 부리고, 때론 몰래 욕도 하며, 가끔 침울할 땐 화도 내며, 필요할 때 항상 같이 살 꽃을 나누는 편안함과 멀리함이 동시에 응답받는 관계다. 아내는 그 남편의 형상대로 변해가는 순응주의자다.

가끔은 자신과 적응하지 못하는 군인 같은 남편에게 딸로서, 여인으로서, 친구로서 보살필 줄도 알며, 팔찌 하나 사들고 오지 못하는 분에게 구애할 줄도 알며, 이웃 아내들의 부러움에 어깨를 펴며 걷기도 하고, 일곱 개의 보따리를 쌀 줄도 알며, 가끔은 단순히 아내로서 소진되는 듯한 한숨에 떨기도 하며, 아내의 영혼을 ! 지킬 줄도 안다. 아내는 복합형 사무기기로 만족한다.

우리는 여성의 성적 구분과 애정의 순도, 아내의 복합성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같음이 다름으로 변질되기 전에, 같음 속에 복합된 여인의 미덕을 다시 보담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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