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과 청렴의 귀감이 된 전주최씨(全州崔氏)

  • 등록 2007.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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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 |名家를 찾아 | 전주최씨(全州崔氏)
전주최씨의 중흥을 일으킨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

   
 
글.홍순석(강남대교수, 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전주최씨 계보에 의하면 전주최씨는 같은 본관을 쓰면서도 시조가 다른 4개 종파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가 대파이다. 전주최씨는 전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지만, 시조이하 5세손까지의 묘가 실전된 상태이다. 가장 오래된 선산은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와 그의 부친 묘소가 있는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이다. 따라서 사실상 전주최씨의 종향은(宗鄕)은 대율리라할 수 있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영면하고 있는 평도공 최유경(崔有慶) 역시 이 마을 출생이다.

전주최씨 가문의 중흥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최유경이다. 그의 아들 6명이 모두 크게 명망을 떨쳐 가문의 성세를 누렸다. 이들 후손들은 각기 분파되어 소파(小派)를 형성하고 있지만, 통틀어 ‘평도공파(平度公派)’라 부른다.

전주최씨가 용인지역에 연고를 갖게 된 것은 최유경의 묘소를 공세동 자봉산(紫鳳山) 아래에 조성하고부터이다. 최유경이 태종 13년(1413)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치자 조정에서는 국장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 때 자봉산 아래 구동(駒洞)을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다. 최유경의 묘역은 경기도 문화재 자료 12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봉산의 묘역에는 그의 아들 사규 (社規)·사강(士康)·사용(士庸)의 묘소가 있다. 장남 사위(士威)의 묘소는 좀 떨어져 있는데, 최유경의 장례 후 3년간 시묘(侍墓)하던 곳이라 한다. 묘역 입구에는 전주최씨 평도공파의 재실인 효렴사(孝廉祠)가 있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의 근원
‘용인’하면 떠오르는 말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성어이다. 진천에서는 이미 ‘생거진천’을 고장의 상징어로 사용하고 있다. 용인시에서는 선뜻 ‘사거용인’이라는 성어를 표방하지 못하고 있다.

예로부터 선현들의 묘역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 용인이다. 그래서 생긴 말인지 몰라도, 이 성어에 얽힌 전설 또한 다양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근거하여 이 말의 근원을 삼고 있는데, 전주최씨 가문에서는 나름대로 이 말의 근원을 제기하고 있다.

평도공 최유경은 생전에는 진천에 살았으며, 세상을 마친 후에는 용인에 영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사실로, 큰 아들 사위(士威)는 생전에는 진천에서 부친을 모셨고, 사후에도 부친의 묘소 아래 영면하여 부친의 넋을 모시고자 유언했다고 한다.

『전주최씨계보』에 의하면, 사위는 평생 부친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려말엽에 벼슬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부친을 따라 낙향했다가 좌랑, 이조의랑 등을 거쳐 한성판윤을 지냈다. 살았을 때 용인에 거주하였던 것은 시묘 3년간 뿐이다. 그는 자손에게 부친 평도공의 시묘 때 거주하였던 여막(廬幕)터에 묘소를 마련하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죽어서도 부친을 가까이 모시겠다는 효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생거진천 사거용인’이 단순히 육신을 살아서는 진천에, 죽어서는 용인에 두었다는 의미의 성어가 아니라, 살아서나 죽어서나 부친을 모시고자 했던 자식의 효행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한다.

■ 최유경(崔有慶: 1343-1413)
최유경은 고려말엽에서 조선 초에 걸쳐 살았던 문신이다. 고려 공민왕 9년(1359), 18세의 나이로 처음 벼슬길에 나섰으며, 전법사총랑, 양광도안렴사를 역임하였다. 서북면 전운사겸 찰방으로 재임중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감행되자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최영이 실각한 뒤에도 창왕의 즉위와 함께 밀직부사로 발탁되었다.

이성계가 조선 태조의 왕위에 즉위하여 녹훈할 때 원종공신에 서훈되었다. 앞서 위화도 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하였다 하여 일부 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성계는 오히려 그의 충의를 칭찬하여 개국원종종신에 서훈한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경상도관찰사, 경기·충청도 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찰하면서 왕정을 도왔다. 태종 1년(1401)에는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4년에 판한성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최유경은 조선 건국 당시 축성도감(築城都監)의 직책을 띠고 서울의 도성을 쌓았으며,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과 호남 제일의 문루인 풍남문(豊南門)을 건립하였다. 그가 지은 <숭례문상량기>가 국립박물관에 전한다.

‘효행(孝行)’과 ‘청렴(淸廉)’은 전주최씨 평도공파
후손들의 정신
평도공 최유경은 효성과 청렴결백한 성품으로도 이름이 났다. 세종대왕께서 그의 효성을 들으시고 친히 효자정문을 내렸다. 태종조의 청백리로 녹선되기도 하였다.

그의 효자정문은 무려 세 곳에나 있다. 충북 청원군 대율리에 정문이 있고, 용정리에 직산십이정문(稷山十二旌門)이 있으며, 진천에는 그의 6남 사흥(士興)의 정문과 함께 있다.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에 소재한 사당 이름을 ‘효렴사(孝廉祠)’라 한 것은 바로 그의 청렴한 기상과 효행에서 연유한 것이다.

큰 아들 사위 또한, 아첨할 줄 모르고 정사는 오로지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청빈한 관리였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공손했던 인물이다. 평도공의 자손 중 효자와 열녀가 12명이나 된다. 충남 천원군 입방면 용정리에는 있는 12정문이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해 준다.

효렴사의 규모는 문중의 사당으로서는 전국 제일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웅장하다. 위패를 모시고 윗부분에 감실(龕室)을 설치한 점도 예외적이다.

외삼문은 6평의 솟을대문으로 ‘창덕문(彰德門)’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창덕문 정면 좌우에는 화강석으로 조각된 해태상 2기가 있으며, 우측에는 1950년대에 새로 건립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본래 조선 초에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다.

용인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평도공파 후손은 다른 문중에 비해 매우 빈약한 편이다. 판윤공(判尹公: 장남 사위)파의 후손으로 최인태씨가 남사면 완장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경절공(競節公: 4남 사강)의 후손으로 최완영씨가 백암면에 거주하고 있으며 더이상 확인하기 쉽지 않다.

남사면 완장리에는 판윤공의 직계 자손들의 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최인태씨의 직계 20대조 이하 55위(位)의 묘소가 있으며, 입구에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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