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언어를 가진 두 가슴

  • 등록 2007.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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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호 교수의 新철학에세이 / ‘한국인 의식의 새로 읽기’
글 한호/시인·평론가 stevenshano@hanmail.net

   
 
한호 시인의 “한국인 의식의 새로 읽기” 칼럼은 21세기를 맞는 새로운 시대상에 어울리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문화철학적 현상으로 조명해본다.<편집자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 신이 웃는다. 그의 속살은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따뜻한 불꽃 혀 날름거리는 벽난로 옆에서 앞뒤 얼굴을 돌려쓰는 그 마음은 어떨까? 한 해를 보내는 거실에서 그의 마음이 무겁다. 시울 붉어진 눈길에 조선 군왕의 어록이 눈에 들어온다. 떠나는 한 해의 어수선함 속에서 그의 말씀으로 온 나라가 수런거린다. 군왕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느니, 할 말 다 했다느니, 시전(市廛) 백성은 자기 이익대로 다른 언어를 토해낸다.

두 얼굴의 언어를 매다는 그는 두 목소리의 두 얼굴을 굽어본다. 인간들은 자기 밥통이 가장 중요해. 타인 뱃속의 온기가 나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서로 뺏으려해. 그래, 인간의 목소리는 뱃속이 찰 때와 빌 때가 서로 다르다. 군왕의 뱃속이 골았으리라고 믿는 백성은 없다. 그러나 백성의 위장에 곰팡이가 끼기 시작하면 다르지. 군왕의 정신에 분명히 백태가 끼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먹이로 뱃속 채우기(경제)는 이성적 작업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머릿속 채우기(지성)는 감성적 나눔이 필요하다. 군왕의 감성적 나눔은 자비와 이해다. 그런데도 이런 언어 풍파에는 감성적 응어리가 그 속에서 용틀임하는 것이리라.

군왕이 감성적으로 헌데가 많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강렬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감성적 동의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엉덩이, 썩는다, 고스톱, 바짓가랑이, 장사 잘했다, 걔 완전히 돌았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형님 백만 믿겠다, 뺑뺑이 돌리고, 굴러들어온 놈, 곱표(가위표)’ 모두가 토속어 사전에 나오는 서민의 감성과 응어리를 그대로 토해내는 질박감이 있다. 강화도 도령시절의 질박한 토속 감성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어느 면에서는 순수성이고, 다른 면에서는 세련된 감각의 부족감이다.

이에 대해 조정대신들의 웅성거림도 만만찮다. ‘막말이다, 원색적이다, 유치하다, 말도 아닌 말장난, 어린애, 궁예 같다, 정신병자, 사이코’ 등으로 같이 받아친다. 이들은 하나같이 ‘어찌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느냐’고 얼굴 붉힌다. 그들은 군왕보다 더 세련된 의상에 더 멋진 마차에 더 호사한 기와집에 살아왔기에, 그가 촌스레 보인다. 뱃속을 골아본 적이 없는 대감들은 자기 정신이 더 선비답다고 느낀다. 여유가 정열보다 소중하며, 풍요한 곳간이 인권과 평등보다 소중하다고 본다.

그러나 막말과 세련된 말, 어느 쪽이 더 진실할까? 있는 그대로(자연, 진실성 등)가 좋은가, 아니면 가꿈(인위성)이 좋은가? 어느 말이 더욱 진실한가? “있는 것을 있다하고, 있지 않는 것을 있지 않다”(아리스토텔레스)고 하는 것이 진실한가? 진리는 대상(사물, 상황) 자체에 있는가, 아니면 그에 대한 인식이나 지각에 있는가? 사회주의 성향은 진리의 기준을 관념론적,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와 행동이 일치되는 유효한 판단, 상대적, 실용적 등의 가치에 둔다. 상대적 진리관은 언어 표현으로 토의할 수 있다. 군왕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적 대상언어를 사용하는데 반해서, 조정대신은 현재 조건에 맞는 대상언어보다는 무한 가치를 주어야 하는 고차원의 언어(메타언어)를 요구하게 된다. 군왕은 사실 언어를 쓰고 있고, 대신들은 명제적인! 언어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두 집단의 언어가 서로 다른 진리에 대한 대응이론을 펼치기 때문에 진리는 제대로 통일될 수도 없고, 백성들에게 제대로 진리가 반영될 수도 없다. 주장하는 자나 공격하는 자나 다 자신의 거짓된 진리로 자기 가치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실성을 찾으려는 의지와 의욕이 둘 다 없기에, 이미 그들 모두에게는 진리 자체나 의지도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는 구체적이지도 않고, 현실적 존재도 없다. 그냥 자기 위치에서 자기 욕심대로 서로 떠들어대는 욕망의 언어일 뿐이다.

이런 언어의 이중율을 내려다보는 야누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돼지해에는 똥돼지들이 더 날뛸텐데, 나의 뒷면 얼굴을 어떻게 내보여야 하나? 새해에는 새 봄이 오려나? 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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