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개인택시 면허 1·2호…그들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

  • 등록 2007.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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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데 왜 놀아 …힘 되는 데까지 일해야지”
삶의 뿌리를 찾아서 / 현역 최고(最古)의 택시기사 원유창(65)씨·김주용(61)씨

   
 
글/조선일보 배한진 기자

“길에서 스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사회면 톱을 장식할 기사거리가 하나쯤은 있다고 보면 된다. 어느 집안, 어느 개인의 삶을 풀어 쓴다고 해도 훌륭한 장편소설이 나올 수 있다.”

기자 생활 4년 차쯤에 모셨던 사회부장이 자주 하시던 말이다. 개개인의 경험과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었다.

이 말을 가끔 떠올릴 때마다 난, 반성을 한다.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얼마나 귀를 기울였고, 취재원 하나 하나의 이야기에 얼마 마음을 열었던가.

개인의 역사는 곧 사회의 역사고 국가의 역사다. 그러니 우리가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곧 역사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번엔 정말 소중한 분들을 인터뷰했다. 개인적으로는 용인의 중요한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또 한번 영광이다.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원유창(65)씨와 김주용(61)씨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원씨는 1968년 용인에서 회사택시를 몰며 택시를 시작했고, 김씨는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 택시핸들을 잡았다. 당시 이들의 소속 회사는 남성운수, 차종은 일제 ‘코로나’였다.

당시 용인은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원씨는 “말하면 뭘 해요. 포장된 길이 한군데도 없었는데 뭘. 이동면만 가려고 해도 다리가 없어 직접 차를 몰고 개울을 건너야 했지”라고 말했다.

김씨도 “양지면 주북리 등 조금만 시골로 들어 가도 차가 빠져 고생한 경우가 셀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용인은 그야말로 ‘개벽’을 한 것”이라며 감회에 빠졌다.

# 한 달 수입 비행기조종사 수준
용인의 현역 택시운전기사 중에서 가장 고참인 두 사람은 평생을 한 동네서 핸들을 잡으며 형님 아우로 살았다.
형님인 원씨는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는 보스기질을 가졌고, 아우인 김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이처럼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사람이 평생을 형제로 지낸 건, ‘진실’을 중요시하는 심성 탓이다.

두 사람은 용인시 개인택시 면허 1·2호라는 기록도 나란히 가지고 있다. 1978년 4월 11일 경기도청에서 용인시에 개인택시 면허 2개를 제비 뽑기로 준다고 하길래 참여를 했다.

용인에서 16명이 접수를 했는데, 6명이 서류심사에서 탈락해 10명만 제비뽑기에 참여를 했고, 나란히 제비를 뽑은 두 사람이 당첨이 된 것. 아우인 김씨가 먼저 뽑아 ‘면허 1호’이고 형님인 원씨는 그 다음에 뽑아 ‘면허 2호’다. 지금도 두 사람의 택시 번호는 김씨가 5000번, 원씨가 5001번이다.

요즘은 장기 불황으로 경기가 침체된데다 택시가 많아진 탓에 운전자들이 많이 힘들다고들 한다. 그럼 당시 택시 운전기사들은 어땠을까.

놀라운 답변이 돌아 왔다. 개인택시 한달 수입이 200만원. 당시 국산 ‘브리샤’ 택시 한 대 값이 210만원이었다. 한달 수입이 차 한대 값이었다는 얘기로 지금으로 따지면 2000만원에 육박하는 셈이다.

“개인택시 면허를 제비로 뽑고 나니까 밖에서 자동차 회사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둘을 납치해 갔어요. 브리샤 택시 사라고. 당시엔 차를 사는 사람도 드물었고, 개인택시만 받으면 차량 대금 밀릴 일도 없으니까 자동차회사로서도 우리가 큰 고객이었던 셈이죠. 끌려가서 갈비 실컷 얻어 먹고 차 사줬지 뭐.”

원씨의 말대로 당시 개인택시 운전기사는 요즘으로 따지면 비행기 조종사 수준이었다.
김씨의 말을 들어 보면 당시 택시 운전기사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당시엔 특별한 일이 있어야 택시를 탔죠. 결혼을 한다거나, 공돈이 생겼거나, 애를 낳게 됐거나. 그러니까 지금처럼 택시가 돌아 다니면서 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차고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손님이 찾아 오는 거죠.”
원씨가 한마디 더 거든다.

“회사택시건 개인택시건, 당시 택시운전기사라고 하면 이미지도 좋고, 아가씨들한테 인기도 좋았죠. 그 때 택시운전사는 나가면 돈이거든.”
택시운전이 좋았던 시절, 그 땐 택시 운전기사 1명에 견습생이 2~3명씩 따라다니며 ‘최고 직장 입사’를 꿈꿨다고 하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택시안에서 아이도 낳아
예전엔 산모가 택시에서 아이를 낳으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간 원씨의 택시에서도 2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김씨의 택시에서도 1명의 새 생명이 세상을 봤다.

김씨는 “백암에서 산모를 태워 수원으로 가는데 중간에 애가 나온다는 거예요. 나는 산모 보호자한테 맡겨 놓고 차에서 내려 저쪽으로 가 있는데, 보호자가 거기 가 있으면 어떻게하냐고 빨리 같이 애 받으라는 거야. 그 산모 그 와중에도 나한테 아들이냐 딸이냐 묻더군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산모를 대접하던 모습에서도 당시 택시운전기사들의 넉넉함을 엿볼 수 있다.
당시엔 택시에서 애를 낳으면 재수가 좋다는 얘기가 있어서, 요금이고 세차비는 받지도 않았고 오히려 산모한테 미역과 기저귀를 사다 주기도 했단다. 원씨의 지갑에는 당시 자신의 차에서 태어난 아이에 관한 신문기사가 지금도 소중히 보관돼 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두 사람이 찾아 준 현금과 귀중품 등의 목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자루에 담긴 소판 돈을 돌려주기도 했고, 지갑이나, 돈 가방 등도 무수히 주인을 찾아줬다고 한다.
이렇게 호황기의 택시를 하며 원씨는 남매를 길렀고, 김씨도 3형제를 장성시켰다.

특히나 두 사람은 40년 가까이 운전을 하는 동안 ‘무사고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운행한 차종만 해도, 브르샤, 포니1, 포니2, 스텔라, 프린스, SM 등 다양하지만 사고 한번 없었다는 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러나 요즘 얘기로 접어들자 두 사람은 금방 한숨부터 짓는다.

“80년대 후반까지 경기가 제일 좋았던 셈이죠. 개인택시는 해고 당할 일도 없고, 정년도 없으니 자신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어요. 그간 택시가 늘어 지금은 용인에 개인택시만 1000여대가 되고, IMF 이후에는 주저 앉은 경기가 좀처럼 회생되지 않고!”

김씨의 말에 원씨도 동감을 한다.
“예전엔 용인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이 동생(김씨)하고 하루에 한번은 꼭 만났거든. 그렇지만 이제는 한 달이 지나도 못 볼 때가 많아요. 택시도 늘어난 데다, 요즘은 손님 한 분 더 태우려 돌아 다니기 바쁘니.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

# 예나 지금이나 어른공경
지난날과 요즘을 비교 하자니 당연히 손님들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요즘 손님들 어떠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세태를 빗대는 원씨의 말. “언젠가 손님을 태웠는데 젊은 사람이 담배를 꺼내 피우는 거야. 가만히 보니까 얼굴 생김생김이 그 동네 사는 내 후배하고 닮았더라고요. 직감으로 후배 아들이라는 게 느껴지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 누구 아들 아니냐?’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깜짝 놀라요. 세상이 참 그래요. 알건 모르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선 담배 피우면 안되지. 그런데 요즘은 그런 걸 잘 모르나봐. 세상이 망그러졌어.”

김씨 역시 젊은 승용차 운전자한테 막무가내로 욕설을 듣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는 “그게 젊은이들 잘못만은 아니다”며 “우리네 부모세대들이 자식 귀한 줄만 알고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라는 해석도 내놨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도 나이드신 어르신들을 손님으로 모실 때는 “어르신 천천히 타세요. 서둘지 마세요.”라고 공경을 베푼단다. 그는 “어르신들이 가장 귀하신 몸”이라는 신조를 늘 가지고 생활을 한단다.

요즘은 손님들이 주로 무슨 얘길 하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 모두 “힘들다는 얘길 가장 많이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가 안좋은 탓이다.
여기에 원씨는 “박정희 대통령 얘기들을 많이 한다”고 소개를 했다. 배고픔을 없앤 지도자, 강한 지도자, 사람들은 그 시절을 많이 그리워한다고 한다.
그리곤 두 사람 모두 “요즘 손님들 100명이면 100명이 공통적으로 욕하는 사람 한 명은 정해져 있다”고 했다.

# 택시는 달리는 백성의 ‘신문고’
택시를 타면 민심을 안다고 했다.
민심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여론조사를 할 수도 있고, 신문이나 방송매체를 봐도 알 수 있다. 또 몇몇 지인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경제나 사회부문 지표들을 모으는 방법도 민심을 파악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택시에서 파악하는 민심이 무슨무슨 조사나 지표들과 다른 것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 40년 무사고 택시운전사들이 전하는 민심은, 그야말로 가감이 없는 생생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 지도층이나 정치인들도 매일같이 텔레비전에 나와 ‘어렵다 어렵다’는 말을 하지만, 이들 두 사람만큼이나 절실함을 담고 있지는 않다.

두 사람을 통해 본 민심은 어둡고 좌절에 빠져있었고,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점.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선 희망도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 운전대를 잡을 것이냐”고 묻자 두 사람 모두 “힘 되는 데까지”라고 힘있게 답했다.
원씨는 “산너머 산이야. 나이 먹었다고 집에 들어 앉아 있는 건 뭣하지. 체력 될 때까지 할 거유. 일할 수 있는데 왜 놀아?”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일할 수 있는데 왜 놀아.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기백이었다. 특히나 일할 수 있는데도 노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한 요즘 세상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배울 수 있는 자세이기도 했다.

두 사람, ‘용인 역사(歷史) 주인공’과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는 순간. 많은 것이 떠 올랐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선 수많은 역사의 주인공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 자리를 지키겠다고 겸양을 보이고 있다. 언제 한번 튀어 본적도 없고, 영웅이 된 적도 없지만 늘 그 자리를 지키기는 묵묵한 분들.

그러나 마주 앉아 차근차근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생생한 다큐멘터리 같은 옛 장면들이 쏟아져 나왔고,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세태진단과 현시대의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나왔다.

‘역사는 영웅이 만들지 않는다’는 ‘에드워드 할렛 카’의 말처럼, 역사는 오늘도 묵묵히 핸들을 잡으며 세상의 소식을 듣고 전하는, 우리 두 분의 ‘아버님’이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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