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武功)으로 가문의 성세를 이룬 명가(名家)

  • 등록 2007.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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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문화유적 중 무관(武官) 묘역…400년 이어져
名家를 찾아 | 남양홍씨 판중추공파 시정공 문중(南陽洪氏 判中樞公派 寺正公)

   
 
글/홍순석 교수,용인향토문화연구회장) | 사진/서정표 (편집장)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된 묘역은 문신이거나 학자의 묘역이다. 그런데 용인시의 문화유적 가운데는 무관(武官)의 묘역으로 일괄하여 지정된 유적이 있어 관심을 끈다.

바로 남양홍씨(南陽洪氏)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 시정공(寺正公) 문중의 무관묘역(武官墓域)이다. 2001년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48호로 지정된 이 유적은 용인의 향토사학자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곳이기에 거의 감춰진 곳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성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문중의 후손들이 아니면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황은 판이하다. 동백지구의 도시화와 함께 도심 아파트 단지 속의 문화재로 남아 있다. 기흥구 동백동 백현마을에 성산 쪽으로 올라오는 길가에 문화재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1995년 4월에 시정공 문중의 묘역을 대대적으로 치산하면서 호석, 상석, 망주석을 설비하고 비석을 세웠다.
2005년도에는 숭천재(崇泉齋)를 건립하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시정공 무관 묘역이 400년간 보존되어 온 유적임에도 예스러운 느낌이 적은 것은 최근의 시설이 눈에 띄게 많기 때문이다.


무공(武功)으로 가문의 성세를 이룬 남양홍씨 판중추공파
서로 조상을 달리하는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을 일컫는 성씨는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오직 남양홍씨(南陽洪氏) 뿐이다. 남양홍씨는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의 전혀 다른 두 계보가 있다.

당홍에서는 고려조의 공신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남양군(南陽君)·문정공(文正公)·판중추(判中樞)·익산군(益山君)·예사공(禮史公)·중랑공(中郞公) 등 6파가 주류를 이룬다.

이 가운데 13세 홍언수(洪彦修)를 중시조로 모시는 판중추공파는 무공(武功)을 세워 가문을 일으킨 가문이다.

홍언수는 고려 말엽에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를 지냈다. 실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고려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조선 태조4년(1395)에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책록되기도 하였다. 그의 충절은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조선 단종 복위 사건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가문이 그의 직계이다. 판중추공(彦修)의 아들인 14세 약(約)· 적(迪)· 승(昇)· 해(海) 4 형제와 약의 아들인 15세 원로(元老)· 형로(亨老)· 이로(利老) 3형제 등 7명이 화를 입었다.

정로(貞老)는 약(約)의 넷째 아들이다. 조선 성종 때 무신으로 중위장(中衛將), 구성부사(龜城府使), 정주목사(定州牧使), 경원부사(慶原府使),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16세 결(潔)은 19세의 나이로 내금위(內禁衛)에 특채되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지내고, 전라좌도 병마우후(全羅左道 兵馬虞侯)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승차(陞次)하였다.

17세 수득(守得)은 도정(都正)을 역임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다.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처음으로 입향(入鄕)하여 집성촌의 기틀을 잡은 분이다. 도정공 수득 이후의 후손들 가운데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공을 세운 분들이 적지 않다.

남양홍씨 판중추공파의 집성촌이었던 중동(中洞) 마을
기흥구 중동(中洞)의 이전 지명은 구성면(駒城面) 중리(中里)였다. 조선시대의 지명은 어장포(於壯浦)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어정(漁汀)으로 불렀다.

이 마을에 남양홍씨 판중추공파 후손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중기이다. 18세 홍제(洪霽)가 조선 선조 때 벼슬에서 물러나면서 기흥구 중동에 정착하였다. 이 분이 바로 남양홍씨 용인 입향조(入鄕祖)이다.

제(霽)는 수득(守得)의 독자이다. 선조 때 무신으로 비변사 낭청(備邊司 郎廳)을 지냈다. 군관(軍官)으로 재임 중에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무공(武功)을 세워 1605년(선조 38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러서 치사(致仕)하였다. 뒤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충남 보령군 성주면에 있는 임란공신숭모단(壬亂功臣崇慕壇)에서도 배향하고 있다. 수원과 용인에 거주하는 남양홍씨 판중추공파 후손들은 이 분을 시정공 문중의 비조(鼻祖)로 추숭하고 있다.

19세 덕연(德演)은 시정공(寺正公) 제(霽)의 장자이다. 세자익위사어(世子翊衛司禦)를 지냈다.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21세 하창(夏昌:1638-1714)은 현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월곶진영 철곶수군첨절제사(行月串鎭營 鐵串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하명(夏明:1645-1705)은 현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전라좌도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 황해도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여수군수(麗水郡守), 충청도 순군절제사(水軍節制使), 삼도병마절도사(三道兵馬節度使),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를 지냈다.

22세 우평(禹平:1674-1744)은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우택(禹澤:1681-1743)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우구(禹龜:1689-1730)는 숙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行龍讓衛副司果)를 지냈다.

시정공 문중의 집성촌이었던 중동 마을은 지금은 자취도 없다. 후손들도 수원, 성남, 용인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해 살고 있다. 단지 묘역만이 남아서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후손들 가운데 대료적인 인물로는 홍재구(용인문화원장), 홍명섭(구성면 초대면장), 홍우섭(6.25전공 충무무공훈장 수여), 홍종우(국정원 경기도 정보처장), 홍재덕(한국족보문화연구소장), 홍재봉(강원도 영림소장), 홍원섭(엽연초생산조합 전무이사)을 비롯하여, 홍관섭, 홍성섭, 홍쾌섭,홍재영, 홍재호, 홍재만, 홍재훈, 홍재천, 홍재석, 홍종완, 홍종만, 홍종태, 홍종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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