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길과 마음에서 천년이 살아난다

  • 등록 2007.02.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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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후손들과 대화…심오함을 짓는 자연의 건축가
Close-up/전통공예건축가 이춘수

   
 
“나무는 죽어있는 게 아닙니다. 세포가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이지요. 나무가 휘잖아요. 그것은 나무가 느끼고 움직인다는 거에요. 즉 살아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아끼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해요. 자연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거지요. 공존하고 아껴야 멀리(오래) 갈 수 있어요.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요. 그래야 우리가 선조들과 대화하듯 미래의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한 거죠. 나무를 아끼고 귀하게 대해줌으로써 먼 후세 사람들과 대화가 되는 거예요.”

나무와 평생 지내오면서 나무 다루기를 자신의 몸보다 귀하게 여기는 대목수 이춘수(56).
이춘수 선생의 삶은 나무와 공존하는 삶, 아니 이춘수 자체를 나무라 할 수 있다. 목재를 단순히 죽은 나무로 대하지 않는 그는 손끝 재주로 나무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연의 심오함을 짓는 자연의 건축가다.
자연과 소통하면서 전통공예건축의 맥을 이어나가는 이춘수 선생.

대화를 위해 의자에 앉자마자 나무를 자르다가 다친 왼쪽 손이 대번에 눈에 들어온다. 보통 목수일이나 건축 일을 하는 사람의 손처럼 투박하고 거칠지는 않지만 몇 번씩 다친 흔적이 드러나 있고, 최근 다친 듯 깊게 패인 상처도 눈에 띈다.

“일은 오른손이 하는데 다치는 것은 왼손이지요.”
생각지 못한 말로 운을 떼는 이 선생.
“다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헤이해져 있다는 의미에요. 맘을 놓지 말라는 계시나 같은 것입니다.”

설령 옹이 때문에 나무가 튀어서 다쳤을 지라도 이 선생은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부주의 때문이지 나무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곱 번을 다쳤는데 그는 다쳐도 병원에 가서 꿰매지 않았다. 처음에 한번 병원을 찾았는데 붕대 감은 손을 바로 다음날 또 다쳤다. 그때 깨달았다. 다친 흉터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픔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에 대한 자책, 기를 모으라는 계시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살이 차 올라와 나아질 때의 고마움이란 것은 받아들이기 벅찬 감동입니다. 아예 잘리지 않은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그는 손을 굉장히 아낀다. 그러나 장갑을 끼고 일하지 않는다.
“나무의 감촉을 못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장갑을 끼지 않아야 내 몸을 내가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내 몸을 귀하게 여겨야 나무를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천하게 굴리면 모든 게 천해 보이고 막 굴리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는 만큼 나무도 귀하게 됩니다. 나무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나무로 인해 인간은 너무나 많은 삶의 위안을 얻습니다.”

#고집
그는 사찰과 전통 한옥을 짓는 대목수이다.
본격적으로 혼자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을 35세로 보면 20여년 동안 전통 건축물을 지었다. 그는 40여명의 후배(제자)를 거느린다. 도편수 아닙니까 했더니 도편수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전체적인 감독관을 의미하는 도편수는 목공부터 석공 와공 단청 철기공 등 건축의 모든 분야를 아울러야 하는데 한 분야에 평생을 바쳐도 모자라는 일을 어찌 다 아우를 수 있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는 건축의 기본인 설계부터 모든 분야를 총 아우르고 있다. 그래도 그는 대목수일 뿐이다. 고집이다.

“이완장군의 정려문을 옮겼는데 향과 자락을 찾아 옮겨드렸습니다. 그때 문중과 싸웠습니다.”
그는 맥을 이어가는 게 전통이고 선조의 뜻을 가져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물론 문중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할 수도 있지만 흐름에 휩쓸려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중에서는 내가 주춧돌을 옮기려하니 굳이 왜 옛것을 옮기려느냐고 했지요. 그러나 지나온 100년을 이어 내가 또 100년을 이어가게 되는 게 아니겠어요. 옛것이라고 쉽게 버리면 뭐가 남겠어요. 더구나 나라에서 한 일을 문중이라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멋스러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이 선생의 고집.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켜 지금은 문중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다. 그는 고집을 ‘끼’라고 설명했다.

# 서라벌의 인연
수원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려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한테 한문이며 붓글씨를 배웠다. 할아버지가 5년만 더 사셨어도 자신은 학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제대로 배웠다.

그는 또 초등학교 시절, 그림을 무척 잘 그렸다. 그래서 그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의 살림살이로는 화가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중학교 때 수채화에 매료돼 있는 그에게 미술선생님이 제도나 조각을 추천할 정도로 제도 조각 분야에 소질을 보였다.

글씨, 그림, 조각, 설계.
그가 목수로 전국의 사찰을 짓게 되는 모든 재능이 이미 어려서부터 갖춰져 있었다.
그는 외가 근처인 미아리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마침 학교 옆 대성목기라는 회사에 친척이 근무했는데, 그 인연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게 됐다.

이춘수의 목수와의 인연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맺어져 갔다.
대성목기는 정부일을 하는 업체였다. 조각에 소질이 있던 그는 그곳에서 3년 반 정도 일하면서 청와대 일을 했다. 다른 나라 귀빈이나 수상급이 오면 매번 대통령 의자를 새로 만들었는데 대통령 의자의 봉황 휘장을 새기는 일을 했다. 이일을 처음 배우던 때가 15세였으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목수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된 셈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전으로 내려가 잠시 가구 일을 했다. 그때가 19세였는데 이 선생은 거기서 사찰 일을 배웠다.

“공포작업을 했는데 맛이 굉장히 오묘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포는 대궐이나 사찰 쪽에서만 쓰는데 건축의 가장 최상의 것을 만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전통건축에 대한 욕심이 생겨 불국사에 2년 반을 머물렀다. 혼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설계를 배우는 학원이 없었기에 그는 불국사에서 나름대로 절이 어찌 지어지는지를 스케치 해가면서 설계를 터득했다. 수원에는 현재의 서라벌목공예사로 맥을 잇는 서라벌연구소를 만들어 놓고 오가며 연구했다.
“모든 작업의 기본이 설계입니다. 설계를 모르면 기능공밖에 안되지요. 즉 건축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건축에 대해 많이 아는 스님이나 고승한테 물었다. 몇 칸에 기둥은 몇 개고 높이는 얼마고 하는 식으로 묻고 배워 종합설계를 나름대로 해 보니 맞아 떨어졌다.

대목들을 쫓아다니며 일할 때 어떤 공법을 하는지 나름대로 물어봤다. 그는 다듬는 법과 맞춤법에 전념했다.
왜 이리 세우는지, 공포란 게 뭔지, 하나하나 물음을 갖고 연구하다 보니 원리가 보였고, 설계를 해보니 그 원리가 터득됐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중후하면서 섬세한 멋이 있습니다. 중국은 대륙풍으로 우아한 면은 있지만 복잡하고 섬세함이 적습니다. 일본 것은 기교가 뛰어나 얕은맛은 있지만 깊이가 없습니다.”
한국건축을 하면서 그는 자연의 섭리를 이어가는 우주의 깊은 멋과 섬세함을 배웠다.

# 천년 건축
“우리건축의 우수성은 나무의 쓰임새를 잘 알고 쓴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무의 성질을 알고 건축에 나무를 쓸 때 오래갈 수 있는 법을 터득했어요. 나무의 진이 아래로 내려앉아 아래 부분이 강한 성질을 이용해 기둥을 세울 때도 위 아래를 구분했죠.”

자연과 한 몸인 나무의 성질을 그대로 살려 자연을 건축한 한국 건축의 우수성. 우리 조상은 나무가 자연에서 있었으므로 자연과 융화돼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25세부터 사찰 일을 했지만 35세가 돼서야 집을 혼자 지을 수 있었다. 효자각, 정려문 등 작은 건축을 먼저 했다. 건축은 종합적인 것인데 모든 일을 안다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의한 것이다. 사찰이나 재실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45세 돼서야 비로서 이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주도에서 쌍계사 13번째 말사인 대덕정사 일을 하고 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절인데 3년 공사다. 내년이면 일반인들이 찾을 수 있다. 일 때문에 싸우기도 많이 한다. 그의 꺾이지 않는 고집 때문이다.

“일주문 들어갈 때 한가지 마음으로 들어갔으니 나올때도 한가지 마음이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 자신은 천주교 신자이지만 평생 절일을 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다. 산 나무로 천년을 살았고, 죽어서도 천년을 값한다. 나무가 살아있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대목수 이춘수는 천년 건축을 짓고 있다.
박숙현 기자 europa@yong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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