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야구 연계 교육의 중요성

  • 등록 2011.05.02 1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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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원야구의 연계교육 시스템 도입과 전국무대 우승 역사는 궤를 같이 했다.
한국 학원야구는 6·25 전쟁으로 4년간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다가 1954년 재개됐다. 서울야구와 인천 야구가 우승기를 번갈아 차지해 1950년대는 ‘경인선’을 탄다고 회자됐다.


1960년대 초 대구야구가 휘날렸고 60년대 말에는 부산야구가 강세였다. 이른바 ‘경부선’을 탄 것이다. 이때까지 호남지역에서는 고교야구 우승컵을 치켜든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971년 황금사자기를 차지한 군산상고에 이어 1976년 대통령배를 품에 안은 광주일고가 전국무대에 등장했다. ‘호남선’이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절대강자도 절대약자도 없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전쟁과 산업사회의 터널을 지나는 숨 가쁜 여건에서도 교육자들과 동문들의 모교사랑, 시민의 지역사랑이 빚어낸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의 야구부원 숫자를 맞춰나갔다. 학생들의 연계 교육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 연계 교육 효과가 우승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1977년부터는 고교야구의 열기가 대학야구까지 번졌다. 경남고를 졸업한 최동원이 연세대로 대구상고를 졸업한 김시진과 군산상고를 졸업한 김용남이 한양대로 진학하면서 관중들이 대학야구를 보러 운동장을 찾고 방송이 대학야구를 중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1981년에는 광주일고를 졸업한 선동열이 고려대로 진학하면서 대학야구는 절정에 달했다.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의 연계교육이 제대로 이뤄진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야구는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아마추어야구 최고봉인 슈퍼월드컵과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기업들이 실업팀을 창단하기 시작했고 야구저변은 갈수록 넓어지기 시작했다. 모교사랑과 지역사랑으로 출발했던 학원야구는 관중 700만에 이르는 ‘프로야구 시대’를 열었음은 물론, 전국적으로 리그만 180여개, 5000여팀, 선수 10만 명을 넘어서는 ‘사회인야구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연계 교육이 이뤄낸 성과이다.
학원스포츠는 날로 발전해 왔다. 공부하며 운동하는 학원스포츠를 만들기 위해 고교야구는 주말리그제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반하는 정책이 2012년 실시될 예정이다. ‘TO제’가 그것이다. 상급학교에 야구선수를 진학시킬 때 10명 이상 받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용인시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송전중학교 1곳뿐 인 실정에서 연계교육을 위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야구부를 창설하는 것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야구하는 학생들이  ‘TO제’에 묶여 좋아하는 야구를 그만 둬야할 사태에 직면해 있다.


‘TO제’는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야구부 창설과 지원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이다. 동문들이 후원회를 결성해 지원하는 명문고교, 식당과 매점의 수익금으로 야구부를 지원하는 유신고, 전용야구장을 건설해 안산공고를 명문으로 키워낸 안산시, 군산상고를 ‘역전의 명수’로 키워 낸 지역기업 경성고무, 청소년야구를 관장하는 미국프로야구단, 지역기업이 지원하는 일본야구.
그들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다

정재헌 팀장 기자 edreamkore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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