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이 화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며 교권 붕괴를 이야기한다. 무너진 교실, 폭주하는 학부모, 통제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어쩌면 가장 쉬운 답일 뿐이다.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요즘 아이들이 왜 변했는가가 아니라, 아이들이 변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부모에게 혼나고, 형제와 싸우고, 동네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으며 자랐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 있었다. 눈치였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법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외동이나 두 자녀가 대부분인 시대가 됐다. 부모와 조부모의 관심은 한 아이에게 집중되고, 아이는 경쟁보다 보호 속에서 성장한다. 여기에 스마트폰이 더해졌다. 싫은 친구와도 다음 날 다시 만나야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불편하면 차단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동체로 이동할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보다 관계를 끊는 능력이 먼저 발달하는 구조가 됐다.
부모도 변했다. 과거 부모들이 아이를 사회에 적응시키려 했다면 지금 부모들은 사회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우리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의 실패를 대신 막아주고, 아이의 책임을 대신 해결해주고, 아이의 갈등을 대신 싸워주기 시작하면 아이는 좌절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실패를 견디는 힘도 배우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봐야 한다. 오늘날 학교의 혼란을 저출산과 스마트폰, 핵가족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편한 해석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먼저 변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도 문제 학생은 있었다. 교실을 뒤집어놓는 아이도 있었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학생도 있었다. 차이는 그 행동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태도였다. 잘못을 하면 집에서도 혼났고 학교에서도 혼났다. 부모와 교사는 적어도 교육이라는 목표만큼은 공유했다. 지금은 어떤가.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도 먼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보다 "우리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말이 나온다. 아이의 말은 진실이 되고 교사의 말은 의심받는다.
그래서 참교육이 인기를 얻는 이유도 단순한 사이다 복수극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폭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진 규칙이 다시 세워지고, 어른이 어른 역할을 하고, 잘못한 사람이 책임을 지는 질서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문득 한국 영화 친구(2001년) 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지금은 인터넷 밈처럼 소비되는 대사지만 당시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 시절 아이들은 부모의 이름이 곧 자신의 이름이었다. 학교에서 잘못하면 선생님보다 부모가 더 무서웠고, 부모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스스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이를 바로 세우는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있었고, 교사가 있었고, 동네 어른이 있었다. 누군가는 안 된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가르쳤다.
물론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체벌과 권위주의까지 그리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은 배웠을지 몰라도 책임을 가르치는 방법은 잊어가고 있다.
우리는 자꾸 묻는다.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
그러나 참교육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가 아니라, "요즘 어른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은 시대의 거울이다. 오늘 교실에서 보이는 모습은 결국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반영이다. 그래서 참교육을 보며 불편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화면 속 아이들이 낯설어서가 아니다. 그 아이들 뒤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어른들의 성찰이다. 그것이야말로 참교육이 남긴 가장 불편하고도 중요한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