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올여름 유럽은 또다시 폭염에 신음하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40도를 넘나드는 더위가 이어지고, 영국마저 "에어컨은 이제 사치품이 아니라 생존 장비"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정작 유럽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폭염이 아니다. 에어컨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에어컨은 너무도 익숙한 가전제품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며칠 안에 설치가 끝난다. 벽걸이든 스탠드형이든 원하는 제품을 고르고, 설치 기사와 날짜만 맞추면 된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시원한 여름을 맞을 수 있다. 에어컨을 사는 일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다.
하지만 유럽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수백 년 된 건물은 외벽을 훼손할 수 없어 실외기 설치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고, 문화재 보호 규정 때문에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곳도 적지 않다. 건물의 전기 용량을 늘려야 하고, 배관을 새로 깔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건물 전체의 설비를 손봐야 한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이나 역사적 건축물에서는 에어컨 한 대를 설치하는 데 우리 돈으로 수천만 원이 드는 사례도 나온다. 한국에서는 에어컨 가격을 고민하지만, 유럽에서는 설치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유럽은 오랫동안 냉방보다 난방이 중요한 대륙이었다. 여름은 짧고 겨울은 길었다. 집은 더위를 내보내기보다 추위를 막기 위해 지어졌다. 두꺼운 석조 벽과 작은 창문은 겨울에는 최고의 장점이었지만, 기후변화로 폭염이 일상이 된 지금은 오히려 열을 품는 거대한 저장고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도시의 역사와 미관을 지키려는 엄격한 규제가 더해지면서 에어컨 보급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냉방기술을 갖춘 기업들이 경쟁하며 에어컨을 발전시켰고, 전국 어디에서나 설치 기사를 쉽게 부를 수 있는 서비스망을 구축했다. 주문하면 며칠 안에 설치가 끝나고, 고장이 나도 빠르게 수리받을 수 있다. 에어컨은 더 이상 부자의 사치품이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이 됐다. 폭염 속에서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일상은 사실 세계적으로 보면 매우 드문 풍경이다.
우리는 여름이면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불평한다.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어도 될지 고민하고, 누진제를 걱정한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밖으로 돌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어떤 나라는 돈이 있어도 에어컨을 설치하지 못하고, 어떤 나라는 설치비만 자동차 한 대 값이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폭염 속에서도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밤을 지새운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그 가치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에어컨 천국'이다. 그러나 곧바로 또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이 천국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에어컨은 전기를 먹고 산다. 폭염이 길어질수록 전력 사용량은 최고 기록을 갈아치운다. 앞으로는 AI 데이터센터가 막대한 전기를 소비하고, 전기차는 계속 늘어나며,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냉방 수요와 산업 수요가 동시에 증가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잘 버텨 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발전 설비와 안정적인 송배전망 덕분에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도 대규모 정전 없이 여름을 견뎌 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안정성을 당연하게 기대할 수는 없다. 발전소를 더 지을 것인지, 원자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확대할 것인지, AI 시대에 맞춰 송전망을 어떻게 확충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폭염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에어컨을 많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다. 국민이 가장 더운 날에도 안심하고 리모컨을 누를 수 있는 나라다. 에어컨 뒤에는 발전소가 있고, 송전망이 있고, 수많은 전력 기술자들의 노력이 있다. 우리가 누리는 시원함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천국 아래 한국.'
올여름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 천국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에어컨이 아니라 그 에어컨을 움직이는 전력 시스템이며, 폭염이 일상이 된 시대에 대한민국의 진짜 경쟁력은 냉방기기가 아니라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국가의 힘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