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사상 최대 실적도 무너지는 시장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역대 최고 실적 발표가 증시 폭락의 방아쇠가 됐다.
국내 증시를 이끌어온 SK하이닉스가 기대 이상의 실적을 내놓고도 급락하자 삼성전자까지 동반 추락했고, 결국 코스피는 투자자들이 마지막 방어선으로 여겼던 6,000선을 허무하게 내주며 장중 5,400선까지 밀려났다.
전날에 이어 이틀 연속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면서 시장은 사실상 공황 상태에 빠졌다. 투자자들의 관심도 "언제 반등할 것인가"에서 "도대체 어디가 바닥인가"로 바뀌었다.
2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는 장중 5,400선까지 밀리며 10% 안팎의 급락세를 보였고, 코스닥도 동반 폭락했다. 양 시장 모두 이틀 연속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은 국내 증시 역사상 처음이다. 불과 장 초반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전날 급락에 따른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며 코스피는 6,200선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SK하이닉스가 실적 발표 이후 상승폭을 모두 반납하고 급락세로 돌아서면서 시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날 발표된 실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는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5배 이상 증가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영업이익률도 세계 최고 수준을 나타냈다. 하지만 시장은 과거 실적보다 미래 전망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컨퍼런스콜에서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고대역폭메모리(HBM) 가격 협상과 공급 전략, 추가 주주환원 정책 등에 대해 구체적인 메시지가 나오지 않자 차익실현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결국 시가총액 1·2위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동시에 무너지면서 지수 전체가 급락하는 도미노 현상이 나타났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폭락을 단순히 SK하이닉스 실적에 대한 실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랫동안 누적된 시장의 불안이 한꺼번에 폭발한 '복합 시스템 쇼크'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가장 먼저 지목되는 원인은 과도하게 높아진 AI 기대감이다. 지난 1년 동안 국내 증시는 AI 반도체와 HBM 시장 성장 기대를 바탕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왔다. 기업 실적보다 미래 성장 기대가 주가에 먼저 반영되면서 작은 실망도 대규모 매도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조정을 '실적 쇼크'가 아니라 '기대치 쇼크'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실적은 사상 최대였지만 시장이 기대했던 미래 성장의 확신을 확인하지 못하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냉각됐다는 것이다. AI 산업의 성장성 자체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기대가 지나치게 앞서 있었던 만큼 작은 변수에도 시장이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시장 구조 자체가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반도체 관련 레버리지 ETF의 급증은 하락장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꼽힌다. 레버리지 상품은 주가가 하락하면 운용사가 위험 관리를 위해 선물과 현물을 기계적으로 매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매도가 또 다른 하락을 부르고, 하락이 다시 추가 매도를 유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낙폭이 예상보다 훨씬 커졌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기업 실적보다 금융상품 구조가 시장을 흔드는 '왝더독(Wag the Dog)'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거센 추격도 투자심리를 위축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중국 메모리 기업 CXMT의 상장 흥행과 국산 심자외선(DUV) 노광장비 개발 소식이 이어지면서 한국 반도체의 독주 체제가 예상보다 빨리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아직 기술 격차는 존재하지만 시장은 현재보다 미래를 먼저 가격에 반영하는 만큼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계심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미국 통화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과 외국인 자금 이탈, 기관의 프로그램 매도까지 겹치면서 시장은 기업 가치보다 투자심리가 가격을 결정하는 전형적인 패닉 장세로 접어들었다. 특히 최근 한 달 사이 코스피와 코스닥에서 서킷브레이커가 잇따라 발동할 정도로 극단적인 변동성이 이어지면서 투자심리 자체가 크게 훼손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엇보다 시장이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은 '6,000선 신화의 붕괴'다. 글로벌 투자은행과 국내 주요 증권사들은 그동안 6,000선을 강력한 기술적 지지선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마저 무너지면서 투자자들은 기술적 분석보다 공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싸다"는 판단보다 "혹시 더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매도를 부추기는 전형적인 공포 국면이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비관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증권가에서는 지금 시장을 '공포가 실적을 압도하는 국면'으로 진단한다. 기업들의 실적 기반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투자심리가 먼저 붕괴한 만큼 변동성은 당분간 이어질 수 있지만, 공포가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과매도에 따른 반등 가능성도 함께 커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실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본질적인 경쟁력이 훼손된 것은 아니며, AI 메모리 시장의 성장성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결국 이번 폭락은 한 기업의 실적 부진 때문이 아니라 AI 기대 과열, 미래 전망에 대한 실망, 레버리지 ETF의 기계적 매도, 중국 반도체의 기술 추격, 외국인 자금 이탈, 투자심리 붕괴가 한꺼번에 겹쳐 발생한 복합 충격으로 보는 것이 시장의 공통된 시각이다.
증권가에서는 이번 조정이 단순한 급락으로 끝날지, 아니면 AI 랠리 이후 시장 체질이 바뀌는 전환점이 될지는 앞으로 HBM 가격 협상 결과와 미국 AI 투자 흐름, 외국인 수급 회복 여부가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지금 투자자들이 확인해야 할 것은 오늘 주가가 얼마나 떨어졌느냐가 아니라 AI 성장 스토리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냐는 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