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고려고등기술학교서 미용과 첫 만남
서울 연희동서 연예인 머리손질 전성시대
스물아홉 나이에 용인 다시 내려와 새출발
남편 화상 시련 딛고 가위질 오뚝이 인생
용인신문 | 수원 고려고등기술학교에서 미용의 첫발을 내딛고, 서울 연희동의 명사들과 배우 유지인의 머리를 만졌던 청춘. 스물아홉에 용인 땅을 찾아와 반평생을 넘게 가위와 빗을 손에서 놓지 않은 이정숙 대표(80)의 삶은 그 자체로 용인 지역 미용의 역사이자 삶의 거친 풍파를 실력과 배짱으로 이겨낸 한 여성 영웅의 드라마다. 손가락 마디가 굽어지고 굵어진 ‘자랑스러운 손’으로 오늘도 단골들의 머리를 단정히 만지는 그를 만나, 반세기를 넘어선 미용 외길 인생을 들어보았다.
■ 떡잎부터 남달랐던 시절, 수원서 서울 연희동으로
이정숙 대표가 미용계에 발을 들인 것은 수원 역전 근처에 있던 고려고등기술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면서부터다. 수료 후 수원 지동의 김교숙 선생 밑에서 미용을 배운 그는 남다른 부지런함과 빠른 습득으로 미용실에서 꼭 필요한 직원으로 거듭났다. 이후 부친의 도움으로 고향인 용인의 한 동네에서 첫 가게를 냈다. 손님이 넘쳐 성공한 듯 보였으나 젊은 혈기에 번 돈을 쓰는 재미에 빠지자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서울 연희동의 한 미용실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지방 발령으로 기존의 원장이 자리를 비우면서 미용실 운영을 온전히 맡게 됐다. 준비된 실력과 특유의 화통한 성격 덕분에 가게는 번창했고, 연희동 시절에는 당시 지역 명사들은 물론 배우 유지인을 비롯한 유명 연예인들의 촬영 현장 머리를 전담하기도 했다.
“그때 연희동에는 귀한 분들이 많이 거주했어요. 특히 영화촬영지가 많았고 촬영이 오면 출장 가서 머리를 해주거나 잠깐 머리가 흐트러지면 손봐주고 그랬지. 그렇게 서울서 4~5년 돈을 벌고 나니까 이제 고향인 용인으로 가서 휩쓸어야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 스물아홉, 용인에 터를 잡다… 이발관 자리에서 일군 성공
1970년대 후반, 스물아홉의 나이에 용인으로 내려온 그가 눈여겨본 곳은 김량장동 현 농협시지부 앞, 문이 닫혀있던 작은 이발관 자리였다. 건물주를 찾아가 매일 같이 졸랐다. 망해서 나간 자리라며 손사래를 치는 주인을 설득해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나가겠다”며 가게를 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한 달 만에 흑설탕 한 포대와 30만 원을 들고 건물주를 찾아가 월세를 협상할 정도로 수완이 좋았다. 이후 국민은행 건너편 작은집 소유 건물 2층으로 확장 이전해 50여 평 규모의 대형 토탈 케어숍을 운영했다. 대형거울 10개를 벽을 따라 둘러치고 직원 15명을 둘 정도로 그의 미용실은 용인 시내 최고의 번화가 명소가 되었다. 머리 연출뿐만 아니라 올림머리, 피부 관리, 신부 화장과 드레스까지 제공하는 당대 보기 드문 토탈 케어 시스템을 갖춘 덕분이었다.
“당시 일반 미용실에서 올림머리 4만 원 받을 때, 나는 수원에서 배운 노하우로 10만 원을 받았어요. 그런데도 나한테 오는 거야. 지금은 예식장에서 모두 진행하지만 당시에는 시집·장가보낼 때 머리 잘하는 집을 찾아다니던 시절이니까 멀리서도 찾아왔지.”
■ 시련을 딛고 일으킨 삶… 송전에서 시작된 제2의 인생
승승장구하던 삶에 큰 시련도 찾아왔다. 남편의 사업장에 불이 나 몸의 70%에 중상을 입는 대형 화상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대표는 미용실 문을 잠시 닫고 영등포 화상센터를 오가며 1년 6개월 동안 남편을 정성껏 간호해 목숨을 살려냈다.
남편의 치료와 재활 후, 그는 무대를 용인 시내에서 처인구 이동읍 송전으로 옮겼다. 시내에서 그를 찾던 단골들이 송전까지 따라왔고, 그의 실력을 아는 지역 인사가 건물을 새로 지어 그를 모셔갈 정도였다. 송전에서도 직원들을 두고 곗돈 파동이나 송사 등 시골 마을 특유의 풍파를 겪었지만, 이 대표는 특유의 담대함으로 이겨냈다.
“돈은 돌고 도는 거라 생각해요. 억울하게 날린 돈에 연연하면 사람이 죽어. 내일 또 벌면 된다, 마음을 비우고 손님 머리에 집중하면 다 풀어집니다.”
그의 넓은 품은 나눔으로도 이어졌다. 남사면에 있던 아동복지시설(고아원) 아이들을 위해 휴무일마다 직원들과 함께 가서 머리를 잘라주고 목욕을 시켰다. 그중 두 명의 아이는 주공아파트 집으로 데려와 중·고등학교 학비를 대주며 자립을 도왔다. 그 아이들이 커서 물리치료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미용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 80세 현역의 자부심… “자랑스러운 손”
미용 인생 58년. 쉬지 않는 가위질은 물론 가는 롯드(파마 도구)를 하루종일 말아야 했고 꼭 필요한 손님에게는 무려 개인에게 120개를 말아주는 정성을 들이는 등 그의 손가락 관절은 굽어지고 마디가 도드라졌다. 순천향대병원 주치의가 10년째 관리해 줄 정도의 직업병이지만, 그는 자신의 손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교육장에 가거나 후배들을 만나면 내가 그래요. ‘이 손 좀 봐라, 나한테는 이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손이다.’ 우리 남편은 나보고 요리도 잘하고 머리도 잘한다고 이 손을 ‘신의 손’이라고 불러요. 살려준 고마움 때문인지 남편이 나를 제일 소중하게 여겨주지.”
이 대표는 지금도 망가진 머리, 딴 데서 망쳐서 온 머리를 고쳐놓을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낀다. 오히려 그런 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머리 스타일이 엉망인 어르신을 보면 먼저 다가가 “돈 안 받을 테니 우리 가게로 오시라”고 명함을 건네는 열혈 현역이다. 그렇게 찾아온 이들은 머리를 마음에 들어 하며 단골이 되고, 서울 박승철 헤어 등 유명 숍을 다니던 손님들까지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송전의 작은 골목으로 내려온다.
최근 유방암 수술을 받고 5개월 만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그는, 자신을 믿고 찾아주는 단골들과 자리를 나누어준 후배 미용사를 위해서라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빗과 가위를 놓지 않을 생각이다.
“미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서 재능을 내려준 사람이 하는 거지. 나는 지금도 가게 문을 열고 손님 머리를 대하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져요.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내 손 끝에서 손님들이 웃으며 나가면 그게 내 삶의 전부입니다.”
용인 최초의 미용실 역사를 쓰고, 80세의 나이에도 지역 이웃들의 머리를 정성스레 만지는 이정숙 대표. 그의 굵어진 손마디에는 용인의 현대사와 한 여성이 일군 위대한 노동의 가치가 훈장처럼 깊게 각인 돼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