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집을 구한 뒤 아이를 낳은 것일까. 아니면 안정적으로 살 집이 생기면서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서울시가 저출생 대책으로 공급하고 있는 신혼부부 장기전세주택 ‘미리내집’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입주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8%가 입주 이후 자녀를 출산한 것으로 나타났다.
첫 공급 이후 2년여 만에 공급 물량도 7000호를 넘어섰다.
아이를 낳은 가정에 사후 지원을 집중했던 기존 저출생 정책과 달리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는 단계부터 안정적인 주거를 먼저 제공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식의 저출생 정책 실험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아이 없어도 먼저 입주
서울시는 2일 2024년 7월 첫 공급 이후 지난달까지 미리내집 7108호를 공급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매년 약 4000호씩 공급해 2030년까지 1만7500호를 추가할 계획이다.
미리내집은 서울시가 2007년 도입한 장기전세주택 ‘시프트’를 저출생 대응형으로 재설계한 주택정책이다.
특징은 출산한 가구에 주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와 결혼을 앞둔 예비 신혼부부에게도 먼저 입주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입주자는 기본적으로 최장 10년 동안 거주할 수 있다. 입주 후 자녀를 낳으면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고 재계약 때는 소득과 자산 기준도 적용하지 않는다.
자녀가 늘어나면 임대주택을 내 집으로 바꿀 기회도 생긴다.
2자녀 이상을 출산하면 거주하던 주택을 시세의 90%, 3자녀 이상이면 80% 수준으로 매입할 수 있는 우선매수청구권이 주어진다.
주택 공급과 출산 지원, 장기 거주, 내 집 마련을 하나의 정책으로 연결한 셈이다.
맞벌이 중산층까지 확대
신청 문턱도 일반 공공임대주택에 비해 낮췄다. 서울에 거주하는 무주택 신혼부부와 예비 신혼부부가 기본 대상이다. 신혼부부는 혼인신고 후 7년 이내여야 하며 예비부부도 입주 전까지 혼인 사실을 증명하면 신청할 수 있다.
소득 기준도 맞벌이 가정을 고려해 폭넓게 설정했다.
전용면적 60㎡ 이하의 경우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소득의 120% 이하, 맞벌이는 180% 이하가 신청할 수 있다. 60㎡를 초과하면 각각 150%, 맞벌이는 200%까지 허용된다.
3인 맞벌이 가구의 경우 60㎡ 초과 주택은 월평균소득 약 1634만원까지 신청할 수 있다. 4인 맞벌이 가구는 약 1760만원까지 가능하다.
저소득층에 한정했던 공공임대 개념에서 벗어나 집값 부담 때문에 출산을 주저하는 무주택 맞벌이 중산층까지 정책 대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경쟁률 최고 213대 1
신혼부부의 반응은 뜨거웠다. 2024년 7월 첫 공급된 강동구 둔촌동 올림픽파크포레온 300호 모집에는 1만7929가구가 몰렸다. 평균 경쟁률은 약 60대 1, 최고 경쟁률은 213대 1에 달했다.
서울시는 이후 아파트에서 다세대·연립주택, 도시형생활주택, 주거용 오피스텔, 공공한옥, 보증금 지원형 등으로 공급 방식을 다양화하고 있다.
입주 후 38%가 아이 낳아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출산이다. 서울시가 올해 1월 미리내집 입주자 101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실제 응답자 216명 가운데 82명, 38%가 입주 이후 자녀를 출산했다고 답했다.
앞으로 출산할 계획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도 84.7%에 달했다.
물론 이 결과만으로 미리내집이 출산을 직접 증가시켰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애초 출산 의향이 높은 부부가 미리내집에 적극적으로 신청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혼과 출산을 결정할 때 ‘안정적으로 살 집이 있는가’가 중요한 변수라는 사실은 다시 확인되고 있다.
출산장려금이나 일회성 현금 지원 중심이던 저출생 정책을 주거와 고용, 돌봄 등 실제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보증금 목돈 부담도 낮춰
서울시는 입주 과정의 목돈 부담도 줄이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보증금의 30%를 거주 기간에 나눠 낼 수 있는 ‘보증금 분할납부제’를 시행했다. 4월부터 8월까지 계약한 533가구 가운데 489가구, 92%가 이 제도를 이용했다.
이에 따라 입주 가구가 초기에 마련해야 하는 자금 부담이 총 765억원 줄어든 것으로 서울시는 집계했다.
앞으로는 우선매수청구권 적용 대상 자녀 범위를 확대하고 실제 주택을 매입할 때 필요한 자금 부담을 낮추는 방안도 검토할 계획이다.
용인도 ‘집 걱정 없는 출산’ 고민할 때
서울의 실험은 용인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저출생 문제는 단순히 출산지원금을 얼마나 지급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이 결혼을 결정하고 신혼부부가 첫째 아이를 낳고, 다시 둘째 아이까지 생각하려면 몇 년 뒤에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특히 수도권에 위치한 용인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청년·신혼부부에게 주거비 부담이 결혼과 출산을 결정하는 중요한 현실적 조건이 될 수 있다.
용인 역시 앞으로 저출생 정책을 설계할 때 출산지원금이나 육아서비스를 넘어 신혼부부 장기전세주택, 공공주택 우선 공급, 보증금 지원, 출산에 따른 장기거주권 확대, 내 집 마련 연계 등 ‘주거와 출산을 묶은 정책’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서울의 미리내집이 실제 출산율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방향은 분명하다.
아이를 낳은 뒤 지원하는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집 걱정 때문에 망설이는 부부에게 먼저 안정된 집을 마련해주는 것. 서울에서 시작된 ‘출산 전 주거지원’ 실험이 용인을 비롯한 수도권 지자체로 확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