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가족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누가 곁을 지킬 수 있을까. 수년째 한집에서 생활비를 나누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며 서로의 일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나 동거인이 있어도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평소에는 사실상 가족처럼 살아왔지만 의료와 행정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법적 가족이 아니다’라는 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더 이상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가족이 아닌 사람끼리 한집에 거주하는 ‘비친족 가구’가 지난해 처음 60만 가구를 넘어섰다. 결혼하지 않은 연인과 친구, 지인, 주거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청년 등 형태도 다양하다. 사람들의 삶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혼인과 혈연을 가족의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
5년 새 18만 가구 늘었다…비친족 가구 60만 시대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비친족 가구는 60만5000가구로 집계됐다. 2020년 42만3000가구와 비교하면 5년 사이 18만2000가구, 40% 이상 늘어난 규모다. 같은 기간 친족 가구는 21만4000가구 감소했다. 전체 가구에서 비친족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도 2.0%에서 2.7%로 높아진 반면 친족 가구 비중은 66.2%에서 60.7%로 낮아졌다.
비친족 가구라고 해서 낯선 사람끼리 사는 집만을 뜻하지 않는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사는 청년, 지인끼리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경우 등이 모두 포함될 수 있다. 과거 가족의 전형이 ‘부부와 자녀’였다면 이제는 혼자 살거나,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거나, 혈연이 아닌 사람과 생활을 공유하는 방식이 동시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비싼 월세에 늦어진 결혼…“혼자보다 함께”
비친족 가구 증가의 가장 현실적인 배경은 주거비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서는 혼자 집을 구하는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친구나 지인과 월세와 관리비, 전기·가스비를 나눠 부담하는 공동생활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고 있다.
올해 1분기 월평균 소비지출을 보면 1인 가구는 약 180만 원이었다. 4인 가구는 총 544만 원이지만 한 사람당으로 나누면 약 136만 원이다. 냉장고와 세탁기, 인터넷 같은 고정비를 함께 부담하면서 1인당 생활비가 줄어드는 구조다.
결혼이 늦어지고 비혼 동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평균 초혼 연령은 남성 33.9세, 여성 31.6세까지 올라갔고, 2023년 청년 조사에서는 비혼 동거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80.9%에 달했다. 결혼과 동거를 반드시 하나의 과정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1인 가구의 외로움과 돌봄 문제도 더해지고 있다. 혼자 사는 청년에게는 정서적 고립이, 고령층에게는 안전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집에서 넘어지거나 갑자기 아파도 이를 알아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는 방이 있는 고령자와 주거비 부담이 큰 대학생을 연결하는 서울시 ‘한지붕세대공감’ 같은 세대공유형 주거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서로 혈연은 아니지만 식사를 나누고 말동무가 되며 때로는 서로를 돌보는 새로운 생활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병원에서는 ‘법적 타인’
문제는 위기가 닥쳤을 때다. 평소 친구나 연인이 한집에서 함께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한 사람이 갑자기 의식을 잃거나 중대한 질병으로 입원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각종 동의나 행정 절차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경우가 있고, 장기 입원이나 요양, 사망 이후 장례와 재산 문제까지 이어지면 법적 가족이 아닌 사람의 권한은 더욱 제한될 수 있다.
함께 산 시간이 1년인지 20년인지는 서류에 나타나지 않는다. 매일 밥을 함께 먹고 아플 때 병원을 데려갔던 사람도 중요한 순간에는 법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비친족 가구 문제가 단순한 주거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의료·돌봄·복지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유다.
해외는 ‘결혼 아니면 남’ 사이에 제도 마련
해외에서는 혼인관계가 아니더라도 신뢰하는 사람에게 일정한 권한을 주거나 공동생활 관계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장치가 운영되고 있다. 미국은 지역별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의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 가족이 아닌 친구나 동거인을 의료대리인으로 미리 지정할 수 있는 제도가 활용된다.
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계약(PACS)’을 도입해 결혼하지 않은 두 성인이 공동생활 관계를 계약으로 공식화하고 세금과 사회생활의 일부 영역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뉴질랜드 역시 일정 요건을 갖춘 동거 관계를 사실상 파트너 관계로 인정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제도는 서로 다르지만 ‘결혼한 가족’과 ‘완전한 타인’ 사이에도 보호해야 할 관계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법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가족의 정의보다 먼저 ‘필요한 권리’부터
한국에서도 변화 논의는 시작됐다. 성평등가족부는 ‘제5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통해 혼인·혈연·입양 중심의 가족정책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활관계를 가족지원 정책에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다만 모든 비친족 가구를 곧바로 법적 가족으로 인정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의료대리와 돌봄, 주거, 복지, 장례 등 실제 생활에서 필요한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부터 단계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히 환자가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 때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미리 지정할 수 있도록 의료대리 제도를 보다 명확하게 마련하는 방식은 비교적 현실적인 출발점으로 거론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가족은 오랫동안 혼인과 혈연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집 안의 풍경은 이미 달라졌다. 혼자 사는 사람, 친구와 집을 얻은 사람, 혼인신고 없이 오랫동안 함께 사는 연인, 노후를 친구와 보내려는 사람까지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다.
60만5000가구라는 숫자 뒤에는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질문은 단순히 누구를 가족이라고 부를 것인가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아프고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순간,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돌봐온 사람에게 어떤 권한을 맡길 수 있을 것인가. 비친족 가구 60만 시대가 우리 법과 제도에 던지는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