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서 가장 질 좋은 고령토 생산된 백암 고안리서 흙장난
훗날 도예 대가 등장 터전… 1998년 용인예총 이끌며 동분서주
세계 최대 가마터 서리 도요지 복원해 ‘체류형 관광 코스’ 소망
용인신문 | 용인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역을 일궈온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휴먼 아카이브 용인’. 이번 주인공은 용인에서 태어나 평생 흙을 만지며 살아온 도예 분야 경기도 무형유산이자 용인예술인총연합회(용인예총) 초대 회장을 지낸 마순관 선생이다. 용인이 품은 위대한 도자 역사와 문화예술의 미래를 위해 지금도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그의 깊고 묵직한 흙빛 이야기를 담았다.
■ 운명처럼 시작된 백암의 흙장난
마순관 선생의 도예 인생은 그가 태어난 처인구 백암면 고안리 마을에서 시작됐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고령토가 생산되던 곳으로 해방 후에도 행남자기 등 주요 도자기 기업들이 흙을 채취해 가던 전국적인 명소였다.
“어릴 적 마땅한 장난감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마을 광산에서 나오는 세계 최상급의 흙을 갖고 조물조물 만지며 놀던 흙장난이 내 도예 인생의 첫 입문이었던 셈이지요. 어르신들이 ‘너 참 잘 만든다, 재주가 있다’ 칭찬하니 진짜 내가 재능이 있는 줄 알고 더 열정적으로 만지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군 제대 후, 마 선생이 태어난 마을 입구에 한국 고미술 백자의 대가인 한익환 선생의 도예 연구소가 들어섰다. 마 선생은 연구원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구소에 머물며 약 6년간 한익환 선생 밑에서 전통 백자 기법을 철저히 익혔다. 이후 자신의 공방을 차리고 독립해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에는 백자에 매료됐으나 1993년 호암미술관 ‘분청사기 명품전’에 시연 작가로 참여하면서 분청사기의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매력에 매료됐다. 이후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현대적 조형미를 접목한 그만의 독창적인 분청 작업을 이어오며 용인 도예의 자존심을 지켜오고 있다.
■ ‘문화의 불모지’ 예총 깃발을 세우다
1998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고 인구가 30만 명으로 급증하던 시기에 지역 문화예술계는 큰 전환점을 맞는다. 외지에서 수많은 예술인이 유입됐지만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예술 활동을 묶어줄 단체나 발표 공간은 없었다. 이때 마 선생이 앞장서 초대 용인예총 회장을 맡아 조직 설립을 주도했다.
“당시 용인은 시로 승격됐지만 전시장이나 공연장 하나 제대로 없는 문화의 불모지였습니다. 처음 3개 단체로 시작해 제 임기 4년 동안 8개 단체를 완성하며 예총의 기틀을 잡았지요. 당시 세종문화회관을 모델로 지어졌던 용인문예회관은 순수 공연보다는 관변 행사 위주여서 음향 시설도 엉망이었습니다. 성악가들이 오면 목이 터져라 노래해도 소리가 전달되지 않아 임시로 음향 반사판을 대고 장비를 보강하며 예술인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발로 뛰었습니다.”
그는 90년대 후반 순수 예술인들이 하나로 뭉쳐 창작열을 불태우던 그 시절을 가장 보람차고 뜨거웠던 순간으로 회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문화예술 단체가 순수한 창작 활동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리거나 변질되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의와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
“정치인들이나 지자체는 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하게 조력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술이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인들 스스로도 권익과 지역 문화를 위해 단합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적극성이 부족했던 점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용인, 관광·경제 자산으로 살려야”
마 선생이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하고 가슴 아파한 대목은 ‘용인 도자의 역사성’과 ‘시립 미술관 부재’다. 용인시 인구가 110만을 넘어섰음에도 제대로 된 시립 미술관 하나 없어 지역 작가들이 안산, 성남, 양평 등 타지로 나가 전시해야 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나아가 그는 용인이 고려 시대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천 년 넘게 도자기를 굽던 ‘한국 도자의 진짜 본향’임을 역설했다.
“많은 이들이 도자기 하면 이천, 여주, 광주를 떠올리지만 우리나라 도자기의 역사적 뿌리는 용인입니다. 제가 8년 동안 직접 산천을 발로 뛰며 조사해 발표한 용인 도요지(가마터) 보고서만 50여 곳에 달합니다. 특히 용인 서리 고려 백자 요지는 가마 길이가 무려 83m로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유럽의 그 어떤 역사적 가마보다 웅장합니다.”
과거 용인은 땔나무와 물, 우수한 고령토가 풍부해 천혜의 도자 생산지였다. 마 선생은 옛 도로망 때문에 이천·여주에 도자 주도권을 뺏겼지만 고속도로망과 교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SK하이닉스·삼성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는 지금이야말로 용인 도자 역사를 복원할 최적기라고 강조한다.
“용인에 에버랜드나 민속촌을 찾는 관광객이 연간 수백만 명입니다. 세계 최대의 가마터인 서리 도요지를 제대로 복원하고 체험공간과 문화상품을 연계한 ‘체류형 관광 코스’를 만든다면 지역 경제와 문화가 함께 사는 어마어마한 상생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용인의 풍부한 대학 인재들과 청년 예술가들을 활용하면 K-컬처의 핵심 콘텐츠가 될 텐데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 무형유산 사명감, 후학 위해 공방 개방
3년 전 경기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마 선생은 이제 단순한 작가를 넘어 기술을 계승하고 전승해야 할 ‘의무감’을 안고 산다. 지금까지 그가 주민자치센터와 각종 강좌 등을 통해 도예를 가르친 제자만 해도 2000명이 넘는다.
최근 작업실을 새로 마련한 그는 자신의 전업 작업실을 주민과 제자들에게 조건 없이 전면 개방했다.
“도예는 가마나 물레 같은 특수 장비가 없으면 개인 생활공간에서 하기 힘든 예술입니다. 명장이나 무형유산에게 배우려면 보통 큰 비용이 들지만, 무료로 공방을 열어뒀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와서 흙과 불을 이용하며 자기 공방처럼 쓸 수 있게 했습니다. 도자 문화가 대중화돼야 뿌리가 깊어집니다.”
■ 흙을 만지느라 튼 손 ‘거장의 메시지’
인터뷰 중 그가 펼쳐 보인 손 마디마디는 오랜 세월 젖은 흙을 만지고 가마 불을 다루느라 갈라지고 터져 있었다. 그야말로 용인의 문화예술을 지켜온 산증인이자 거장의 훈장이다.
마순관 선생은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누군가는 잊혀가는 용인의 위대한 도자 역사를 기록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평생을 바쳤다.
110만 거대 도시로 성장한 용인이 외형적 팽창에만 머물지 않고 깊이 있는 문화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흙 속에서 천년의 역사를 빚어온 마순관 선생 같은 거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