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인과응보의 섭리는 실로 준엄하다. 인사가 미치지 못하면 세속의 법이 다스리고, 세속의 법망마저 피한다면 끝내 천도(天道)가 그 책임을 묻는 법이다. 특히 권력이 오만함의 덫에 걸릴 때, 그 끝은 예외 없이 차가운 철창으로 귀결됨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목도해 왔다. 임기를 마친 후든, 혹은 임기 중 탄핵의 불명예를 안고서든, 권좌에서 내려와 수금(囚禁)의 몸이 된 전직 대통령들의 뒷모습은 우리 현대사의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국민은 형언할 수 없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 형식을 빌려 선포한 비상계엄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불협화음이었다. 상기된 안색으로 계엄령 선포문을 낭독하던 그의 모습에서 국민이 느낀 온도차는 참담했다. 평생을 공직에 몸담으며, 특히 검찰 총장으로서 전직 대통령들을 단죄하는 데 앞장섰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집권 3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감행한 무리한 계엄 선언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자충수가 되었다. 현재 그는 감옥에 있다. 국가의 녹을 먹는 처지는 변함없을지 모르나, 권력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그 육체적·정신적 체감 온도는 분명 천양
용인신문 |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과거와 현재의 유사성을 들어 역사의 회귀를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 똑같은 사건은 절대 재현되지 않는다. 시대마다 기술의 층위가 다르고, 주체가 지닌 가치관과 환경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500년 전의 화포가 오늘날의 데이터 알고리즘과 프레임 전쟁으로, 과거 군주의 결단이 현대 유권자의 표심으로 치환되었듯 말이다. 다만 그 변주(變奏)는 때로 소름 끼칠 만큼 닮았다. 시대라는 외형은 바뀌어도 ‘인간의 본성과 승부의 원형’이라는 핵심 기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바부르가 구사했던 화포라는 수단이 오늘날 다른 도구로 대체되었을 뿐, “적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책으로 판단력을 마비시킨다”라는 승리의 법칙은 같다. 우리가 과거를 고찰하는 이유는 어제를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선 내일 속에서도 면면히 흐르는 ‘승리의 감각’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바부르가 거둔 승리는 단순한 정복을 넘어 전쟁의 본질적 작동 원리를 통찰하게 한다. 당시 이브라힘 칸 로디는 병력과 물리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의 전쟁 관은 ‘물량의 총합’에 고착되어 있었다. 승리는 군대의 규모와 자산
용인신문 | 오는 6월 3일 실시되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8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에는 예비후보들의 명함이 뿌려지고 있지만, 정작 이들이 뛰어야 할 ‘운동장’인 선거구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어느 동네가 내 선거구인지, 내가 투표해야 할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초유의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가 국회의 직무 유기로 인해 ‘깜깜이 선거’라는 조롱 섞인 오명을 뒤집어썼다. 공직선거법이 정한 선거구 획정 시한은 이미 지난해 12월 5일이었다. 법이 정한 약속을 국회가 스스로 어긴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이번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는 지방선거 163일 전에야 겨우 구성되었고, ‘역대 최악’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 그마저도 여야의 극한 대치로 사실상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중앙 정치권의 갈등이 지방자치를 인질로 삼는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각하다. 중앙 정계의 힘겨루기에 지방선거가 부속물처럼 취급받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입법 기관인 국회가 스스로 법을 어기는 것을 넘어, 국민의 참정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특히 용인시의 상황은 전국 어느 곳보다 엄중하다. 용인은 인구
용인신문 | 용인은 과연 하나의 도시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를 망설이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용인의 다소 쓸쓸한 자화상이다. 수지는 분당과 판교를 바라보고, 기흥은 삼성전자와 신갈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생활권을 형성하며, 처인은 광활한 대지와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미래의 땅으로 구획되어 있다. 같은 행정구역 안에 있지만 시민들의 일상과 생활 반경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지형적으로는 석성산과 광교산이 도시를 가로막고 있고, 행정적으로는 급격한 점적(點的) 개발이 남긴 흔적이 도시의 연속성을 끊어 놓았다. 대규모 택지 개발과 산업단지 조성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도시 전체의 균형과 연결성은 충분히 고민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리하여 용인은 이제 ‘한 지붕 세 가족’을 넘어, 서로의 안부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섬들의 집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분절된 조각들을 하나로 잇는 ‘보이지 않는 실’은 무엇일까. 나는 그 해답을 ‘용인 시민만을 위한 100% 자체 라디오 방송’에서 찾고자 한다. 거대 언론의 권위적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하루 24시간 흘러나오는 지역 밀착형 라디오 말이다
용인신문 | 노나라 양공 22년 경술지세 11월 경자일에 태어난 공자는 난 지 3년이 채 못 되어 부친 숙량흘이 죽었으며, 그로부터 13년 뒤 공자 나이 16세 무렵 모친마저 잃었다.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아 어린 공자가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복지 제도가 잘되어 있어 나라가 어린이를 우선하는 정책을 펴는 것도 아니었을 테고,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어린 공자가 선택한 것은 바로 '공부'였다. 하루는 일국의 재상 격인 태재가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물었다. "그대의 스승 공자께서는 성인이신가? 어찌 그리 할 줄 아는 것이 많으신가?" 그러자 자공이 우쭐하여 스승인 공자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대답했다. "공자님은 진실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이시고, 또 할 줄 아는 것이 많으십니다." 물론 태재의 이러한 물음 속에는 공자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노회하면서도 저열한 비아냥이 담겨 있었지만, 강호의 경험이 적었던 자공으로서는 거기까지 태재의 말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며칠이 지나 이 일을 알게 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 천했다. 그렇기에 밑바닥 일부터 능하지 않은 것이 없노라." 쉽게 말해서 공
용인신문 |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중동아시아에 『천일야화(千一夜話)』가 있다면 한국에는 『대동야승(大東野乘)』이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천일야화』와 『대동야승』이다. 설화·야사·전기의 본질은 이야기다. 서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 일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되, 어떤 특정한 사실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서사의 특징이다. 설화·야사·전기가 특정 사실에 기반한 서사라면, 소설은 변주와 확장을 통해 그 서사를 극대화한 장르이다. 많은 서사 양식 중에서 소설은 다른 장르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다. (사) 한국작가회의 소속 소설가들이 새롭게 중·단편소설로 쓴 한국민중운동사를 들고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시도를 하고 있다. 소설로 읽는 한국문화사 제5집 『소설로 읽는 한국민중운동사1: 전통시대편』에서 김민효의 「운명에 이끌리다」는 묘청의 난을, 유시연의 중편소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는 만적의 난을, 엄광용의 중편소설 「전설이 된 숨은 용」은 삼별초의 난을, 김주성의 신작 「과녁 없는 살(薩)」은 임꺽정의 난을, 정수남의 중편소설 「꺼지지 않는 횃불」은 홍길동의 난을, 백영의 단편소
용인신문 | 한국인의 53%는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는 미국인의 30%가 방송이 아닌 유튜브, 틱톡, X 등 SNS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한국인이 유튜브를 이토록 맹신하게 된 것은 기성 방송언론이 신뢰를 상실한 결과다. 하지만 유튜브는 알고리즘이 형성되면서 소비자가 믿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선택하게 하는 등 폐해가 엄청나다. 우선 유튜브는 자극적인 섬네일과 이른바 숏츠로 소비자를 유인하고 일단 접속하면 편파적인 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친다. 구독자 증가는 광고 수입으로 이어지고 채널 운영자는 유튜브 구독자와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하거나 열심히 퍼나른다. 또한 슈퍼챗이라는 것이 있어 구독자가 유튜버에게 직접 격려금(금일봉)을 보낼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의 대형 유튜버는 팬덤 층을 형성한 구독자를 거느리고 정치적으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현재 가짜뉴스 자체를 처벌하는 단독법은 없다. 대형 유튜버는 분열에 기반하여 가짜뉴스를 퍼트리고 문제가 되면 표현의 자유라는 보호막 뒤로 숨는다. 국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는 가짜뉴스를 규제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이제 시급한 당면과
용인신문 | 선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시험대 위에 올린다. 어떤 이는 지지 정당을 향해 뜨겁게 열광하고, 누군가는 냉소와 분노를 삭인다. 혹자는 최악만은 피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투표소에 들어선다. 거리마다 내걸린 공약은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돼 있지만, 그 이면에서 무엇이 실질적으로 다른지는 좀처럼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유권자의 고민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그래서, 누가 내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 것인가.” 용인 수지구는 이 질문이 가장 치밀하게 반복되는 공간이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했듯 국가는 세대 간의 유기적 계약이지만, 그 계약이 일상의 안정으로 체감되지 않을 때 유권자는 언제든 파기를 선택한다. 지난 10년간 수지의 투표 궤적은 특정 이념에 고착된 지형이 아니었다. 민심은 시대적 조건과 자산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며, 삶의 질이라는 기준 위에서 끊임없이 재편돼 왔다. 변화의 출발점은 2017년 대통령 선거였다. 전통적 보수 강세 지역이던 수지에서 나타난 선택은 단순한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헌정 질서의 회복과 국가 운영의 정상화라는 ‘상식의 복구’에 대한 열망이 표심에 투영된 것이다. 보수의 본
용인신문 | 성군을 만나는 것은 백성의 지극한 복이다. 역사적으로 주나라 무왕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초야의 현자를 등용하자 천하의 민심은 자연히 주나라로 향했다. 순임금은 백성 중에서 청렴한 고요(皐陶)를 발탁해 다스리니 불인(不仁)한 자들이 멀어졌고, 탕임금 역시 평범한 농부였던 이윤(伊尹)을 등용해 태평성대를 열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세상을 바로잡는 도리에 대해 “곧은 자를 들어 굽은 자 위에 놓으면, 굽은 자들이 그로 인해 곧게 될 것”이라 역설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는 만고의 진리다. 개봉부 양성 땅 괴리 마을에 살던 허유(許由)는 의(義)를 근거로 도리를 실천하며 살았다. 그릇된 자리에는 앉지 않았고, 정당하게 일해 얻은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 않았다. 그의 깨끗한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자 하루는 요임금이 그를 찾아와 천하를 물려주려(禪讓) 했다. 그러나 허유는 정중히 사양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미 천하를 잘 다스려 백성이 근심 없이 살고 있거늘, 만약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내게 필시 허물이 생길 것이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 허유는 세속의 유혹을 피해 기산(箕山)으로 도망쳤다. 가는 길에 설결이 급히 가는 이유를 묻자
용인신문 | ‘말을 잘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적 힘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이 학문으로 성립되었듯, 말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사람과 권력, 그리고 공동체를 움직이는 도구였다. 그러나 말의 힘이 클수록, 그 말이 가벼워질 때의 위험도 커진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말 속에서 오히려 신뢰를 잃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이 많으면 존재감이 커지고, 정치인이나 권력자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말이 많아질수록 모순도 함께 늘어나고, 그 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신뢰는 깎여 나간다. 현명한 사람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말을 통해 질서를 세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말 그 자체보다도 ‘속내를 추측하여 말하는 행위’다. 누군가의 의도를 짐작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해석해 유포하는 순간, 말은 설명이 아니라 권력이 된다. 그리고 그 권력은 공동체를 안정시키기보다 흔드는 쪽으로 작동하기 쉽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삼국지 속 조조와 ‘계륵’의 고사를 떠올리게 된다. 한중을 둘러싸고 진퇴양난에 빠진 조조는 군호로 ‘계륵’을 택했다. 이는 포기하기에는 아깝지만, 더 큰 희생을 치르며 지킬 만큼의 전략적 가치도 아니라는 복합적
용인신문 |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하 호칭 생략)이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납치하여 미국 법정에 세웠다.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은 파나마의 실권자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파나마 방위군 총사령관)을 체포하여 미국 법정에 세웠었다. 노리에가는 사실상 파나마의 통치자였지만 대통령은 아니었다. 36년이 지난 2026년 1월 3일 트럼프는 150여 대의 공군기를 동원하여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일대의 군사시설을 폭격하고 육군 특수전 부대 델타포스를 투입하여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납치했다. 21세기에 벌어진 트럼프의 마두로 납치는 미국이 사실상 신제국주의로 치달리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공연하게 선포한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고립주의를 지향하는 듯했던 트럼프는 돈로주의(먼로주의를 트럼프와 합성한 용어)를 표방하며 서반구(남북아메리카 대륙)를 미국의 나와바리(영역)로 못박았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를 제거하고 일단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승인했다. 트럼프는 다음 차례는 콜롬비아, 쿠바, 멕시코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의 병합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덴
용인신문 | 지방선거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는 평가의 시간이다. 그래야만 한다. 평가가 빠진 선거는 정치를 타락시킨다. 특히 지방선거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지난 임기 동안 지방정부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를 따져 묻는 자리가 지방선거다. 잘한 지방정부는 선택받고, 잘못한 지방정부는 심판받는 것. 이것이 정석이고 정수이며,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방선거는 오랫동안 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유권자의 선택 기준은 지방정부의 행정 성과가 아니라 중앙정치의 흐름, 대통령 지지율, 정당 구도에 좌우돼 왔다. 지방선거가 ‘지방정부 평가’가 아니라 ‘중앙정부 중간평가’처럼 치러지는 일이 반복돼 왔다. 그 과정에서 지방정부의 책임성은 점점 흐려졌다. 여름철 집중호우로 도로가 잠기고 하천이 범람했을 때, 겨울철 폭설과 빙판길로 시민들이 다치고 출·퇴근길이 마비됐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재난 대응과 안전 관리, 제설과 배수, 생활 인프라는 지방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실패가 선거에서 실질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방자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지방자치라면 지방정부는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