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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대일외교의 중심

용인신문 기자  2005.02.11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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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포로를 찾아오고 계해조약의 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를 건의하는 등 조선-일본 문화교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귀한 장인정신, 지극한 효성, 불굴의 의지, 애국심은 현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

충숙공의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으로 1373년에 울산에서 출생해 1445년(세종27) 2월 73세로 별세했다. 대일 외교의 일선에서 조선 전기의 한일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독보적 인물이며, 중인 계급인 아전에서 출발하여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01-43년의 43년간 40여회 일본(대마도-일기도-유구 포함)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됐다. 그 중 왕조실록에 사행의 활동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 해도 13회에 달한다(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공이 일본으로부터 쇄환해 온 조선인 포로는 모두 667명으로 기록되?있다.

공은 조선의 대일외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었다. 조선 전ㆍ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은 모두 30회였는데 공은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공은 또한 통신사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사행에 참여하였다. 조선 전기 200년간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대한 사행은 40회(대마도33+일기도4+유구국3)였는데 공은 이 중 7회의 사행에 참여하여 가장 파견빈도가 높다.

왕조실록에는 세종8년에 통신사로 일본으로 떠나는 공에게 임금께서 갓과 신을 하사하며 이렇게 당부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이에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하지 말라.”참으로 아름다운 군신간의 사랑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공은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근세 이전 한일 관계에 있어 민간의 국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파견하는 공식 사행은 일차적으로 정치. 외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문화의 국제교류에 있어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특히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전파, 일본식 자?물레방아의 도입, 화폐의 광범위한 사용,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대한 건의가 눈에 띈다. 사행은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課稅),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행에서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해 문물 및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사행의 접대를 통해 음식문화와 일상 생활문화의 교류도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