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극복 혹은 단절

용인신문 기자  2005.11.14 10:05:00

기사프린트

   
 
6ㆍ70년대 팝이 다시 뜨고 있다.
영원한 팝의 클래식 비틀즈는 그렇다 치고 ‘호텔 캘리포니아’가 한동안 휘젓더니 국내 영화음악에도 올드팝이 단연 강세를 보인다. 뉴욕에서는 올드팝 디스크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외신도 경이롭다. 이미자는 물론 나훈아, 조용필 조차도 박제된 유성기로 남아있는 국내현상을 보면 더욱 답답해진다.
단절된 문화현상이다.

극복이냐, 단절이냐. 세대차이냐, 문화관의 차이냐. 서양의 그것이냐 우리 것에 대한 그것이냐.
특히 80년대를 고비로 극복이 아닌 단절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다. 어물쩡 하다가는 ‘사오정’이 되기 십상이다.
문화란 과거의 가치관이 농축되고 여과되어 현재의 가치관과 맞아 떨어진 사회적 현상. 이러한 현상이 면면이 이어져 온 역사와 사회적 행동규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따라서 과거가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제2공화국은 제1공화국과의 단절을 원했다. 제3공화국은 그 앞의 것들과 단절을 원했다.
제1공화국은 경찰이 나라를 망쳤고 제2공화국은 언론이 나라를 망쳤다고 한다. 제2공화국의 언론현상이 지금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물론 제3공화국부터는 빛나 계급장의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권력이나 사회현상은 앞에서의 그것들과 단절되기를 원했다.

참여정부 역시 앞서의 그것과 차별화, 그리고 극복 또는 단절을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제2공화국 시절 처음 사이비 언론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자유당 정권에 짓눌려 있던 민의의 표출이라고도 했고 민주를 앞세운 이념의 충돌이라고도 했다. 2000년대 오늘의 언론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극복되지 못했다.
우후죽순이 무색하다. 창궐하는 언론의 힘은 매우 강하다. 비판을 빙자한 무차별 포격은 힘없는 백성들조차 주눅들게 한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해도 여전히 언론의 힘은 세다. 단절의 사회현상이다.
극복과 단절이란 극명한 양단간에는 피치 못할 사연들이 따르게 된다. 앞에서의 것들은 전면 부정하고 내가하는 새로운 일만이 오로지 옳은 일, 바른 일이라는 편협한 생각들이 문화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고급의 예술, 고급의 사회에서는 전통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룬다. 이를테면 오페라는 수십년이 넘도록 큰 변화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대중예술과의 확연한 변별력을 갖게 된다. 토스카는 백년이 되도 토스카일 뿐이다. 그러나 예술성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다.
언론의 금과 옥조는 비판정신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 말고 정론에 입각한 비판적 지지를 말한다. 한건 위주로 터뜨리고 보는 언론이야말로 공공의 적이다. 아니면 말고 그 뒤의 후폭풍은 온전히 당한자의 몫이다. 옛날에는 그랬다. 하면서도 옛날의 그것을 닮아간다. 새로운 문화의 세기는 새로운 언론의 소명을 원한다. 단절이냐 극복이냐.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우리는 어떤가.
오직 ‘새술은 새부대에’빠져있을 뿐이다. 정치도 문화도 언론도 사령탑이 바뀌면 전면 재개편이다. 마디마디 옹이만 박힐 뿐 새순이 돋아날 여지가 없다.
과거와 단절된 문화는 그야말로 사생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와 전통에 매달려 헤어나지 못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뒤바꾸려는 ‘힘의 논리’는 더욱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