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제헌국회가 제정한 ‘지방자치법’은 초반부터 시행이 보류됐다. 이승만 정부가 중앙정부임명제를 통한 권력분산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2대 국회가 이승만 정부를 강하게 견제하자 이승만은 국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지방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나중에는 이승만의 입맛에 맞도록 지방자치법 개정을 반복, 주민자치 본질을 상실한 채 장기집권의 도구로 이용했다.
다행히 4·19혁명 후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1960년 11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시·도·읍·면 지역까지 지방자치를 전면 실시키로 했다. 그러나 장면정부의 지방자치는 시작도 하기 전 5·16군사정변에 의해 폐기됐다. 박정희 군부는 먼저 지방의회를 해산했고, 1961년 6월엔 시·도지사·시장·군수를 임명제로 바꿔 국가공무원 자격을 부여했다. 지방자치의 단절은 그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장기화됐다.
단절의 시기는 6공화국 출범 후인 1989년 지방자치법 제정이후 막을 내렸다. 1991년, 드디어 기초의회와 광역의회 선거를 했다. 그러나 여권은 3당 합당(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통합)이후 경제안정을 내세워 자치단체장 선거를 1995년으로 미뤘다. 반쪽짜리 불구형태로 출발한 지방자치는 문민정부 출범 후인 1995년 6월 27일 4대 지방선거(기초의회, 광역의회, 기초단체장, 광역단체장)실시에 의해 완성된다. 물론 권력분산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의 지방자치는 행정권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전한 상태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자치의 역사를 보며 아쉬운 것은 ‘정치적 도구’로의 끊임없는 수난이다. 정치권은 여전히 유권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방자치를 대권이나 총선의 교두보로 탐을 낸다. 그러니 지방자치가 정치적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방자치의 성패요인은 자치단체장의 올곧은 역할과 자질에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공천권을 빌미로 후보자 줄 세우기에 혈안이 돼 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뽑기 위해 공천권을 휘두르고 있다. 국회의원 권위를 세우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면, 유권자를 농락한 처사임에 분명하다.
최근 일부 정당이 공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자 공천심사위원회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한다. 객관적인 심사보다는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나 운영위원장들의 입김이 작용, 공천에서 탈락했다는 주장 때문이다. 탈락자들의 불만스런 감정이 폭발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천심사위가 후보들의 자질과 득표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면, 분명 민주주의를 빙자한 반민주행위임에 틀림없다. 편파적 공천심사는 일종의 정치적 테러일수도 있기에 언젠가는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생소한 이름들이 시장후보 반열에 오르고 있다는 것. 그들의 인품이나 경력은 훌륭하고 화려할지 몰라도 ‘용인지역을 전혀 모른다’는 부분에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누구누구는 어떤 후보를 밀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기정사실화되면서 정치판의 분위기는 더욱 흉흉해지고 있다.
“읍·면·동사무소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시장후보가 될 수 있느냐, 지역실정도 모르면서 어떻게 지방행정에 경영마인드를 도입할 수 있겠냐”는 등등의 말이다. 이는 과거 군사정권시절 관선 단체장을 임명할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다. 지역을 이해하고 배우는데 만 적어도 1~2년이 걸릴 텐데, 자치단체를 어떻게 경영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몇몇 특정 후보들을 겨냥한 말로 들린다.
그런데 대다수 주민들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왜 일까. 어쨌거나 여야 모두 단체장에 대한 공천이나 경선을 앞두고 있다. 바라 건데, 여야는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시민의 입장에서 지방자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인물을 엄선해 본선에 진출시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