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이다. 한국교육신문에 충주 용산초등학교 이창규선생님의 ‘나미라는 여학생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중 선생님과 나미라는 학생과의 대화 한 토막만 소개하겠다.
“사실은요, 제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요, 선생님이 수범이가 저를 좋아하도록 만들어 주세요.” 나미가 선생님에게 한 말이다.
얼마 후, 여름방학에 수범은 전학을 갔다.
“선생님, 전 수범이는 이제 포기했어요. 다른 애 소개해 주세요. 상준이요.”
- 주저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내 쪽이다 - 선생님 말씀.
“수범이는 전학가서 만나기 힘들고, 휴일에 공원 같은데 같이 놀러가기도 어려워요”
- 어린이는 어른이 아버지라더니 ‘못 말리는 어른의 아버지’인가 보다.- 선생님 말씀
1982년에 일본 훗카이도(北海道)대학에서 국립대학으로는 처음으로 한글 강좌가 탄생했다.
일주일에 이틀을 한글강좌에 나가 강의를 했다. 이 대학은 캠퍼스가 넓기로 유명하다. 학생들의 기숙사(寄宿舍)도 잘 구비되어 있다. 내 강의를 듣는 예쁜 여학생 A는 기숙사에서 의대 재학생과 동거하다 시피했다. 이 사실은 언어학과 학생도 교수도 다 알고 있었다. 하루는 나에게 와서 다음 주 내 강의에 결석하겠다고 신고해 왔다. 남학생과 동거 비슷한 생활을 해도 장학생이고 학교생활에는 충실한 모범생이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고향에서 부모님이 자기 혼담이 있다고 선보러 오라고 해서 간다고 했다.
내 생각에 한 청년이 고민께나 하겠구나 생각했다. 그 다음 주에 A는 내 강의실에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벌써 선을 보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쉽게 결정하고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그 뜻은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그 후로는 캠퍼스에 A양과 애인은 완전히 남이었다. 서로가 아는 척도 아니하였다. A양은 애인에게 “선을 본 남자는 자기의 일생을 맡길만한 남자로 판단해 결혼하기로 했다”고 얘기했고, A양의 애인은 알았다는 말과, 잘 결정했다는 인사말인지 칭찬인지를 남기고 헤어졌다고 들었다. 그 후로 둘은 완전 남이었다. 추억이니 그리움이니 한 번만 더 만나자는 등의 감정이나 표현은 전혀 없었다. 속생각은 어떤지를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남이었다.
세대와 민족의 차이도 있을 테지만, 이 때 이들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살을 맞대고 살았을 사인데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으며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신사고의 정조라는 것을 후에야 알고 이해도 했다. 이들에게도 정조에 대한 율법은 있었다.
“절개와 정조란 현재 내가 만난 사람을 위해 어떠한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어선 안 된다”라는 엄격한 율법이 있었다. 비교적 성관계가 개방적인 사회에서 가정이 형성되고 단란한 가정이 유지되는 것도 이런 도덕관(?)이 존재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고지식한 머리로는 별로 찬성할 수 없는 신사고였다.
그 후 25년이 지나서 용산초등학교 이창규선생의 글을 읽었다. 역사의 흐름을 누가 막으랴?